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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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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무서워요, 잊혀간다는 것… 많이 힘들지? 그 말 안 듣고 싶어요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의 기록⑨— 박용현·박성욱씨 인터뷰
등록 2026-09-10 21:30수정 2026-09-12 12:16
전남 무안국제공항 1층 분향소에 박용현·박성욱씨 가족의 사진이 놓여 있다. 박용현 제공

전남 무안국제공항 1층 분향소에 박용현·박성욱씨 가족의 사진이 놓여 있다. 박용현 제공


179명이 사망한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발생한 지 1년9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유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하고 진상규명도 제자리걸음인데, 지역에선 공항을 다시 운영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보도가 거듭 나온다. 한겨레21은 유가족의 구술을 토대로 한 참사 희생자의 기록을 이어간다. 이번호는 참사로 어머니 신복남씨, 큰어머니 김복자·정선옥·안미정씨, 작은어머니 최선임씨, 누나 박은정씨까지 여섯 가족을 잃은 박용현씨와 그의 사촌 동생 박성욱씨의 구술이다. _편집자

 

박용현(이하 용현) “희한하게 우리 집은 성욱이도 그렇고 남매끼리 엄청 사이가 좋아요. 어릴 때부터 집안 어른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고 자라다보니 형제에게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번 일로 더 친해졌어요. 요즘은 거의 붙어살다시피 해요. 그냥 얼굴 보려고 만나요. 둘이 또 차도 좋아하니까 드라이브도 같이 다니고 최근엔 장도 같이 보러 갔어요.”

박성욱(이하 성욱) “하루도 안 빠지고 보죠. 일하고 있으면 와서 이야기하고 화요일은 공 차러 같이 가고 세차하고.”

용현 “7살 차이. 그런데 7살 차이 난다고 별로 안 느껴져요.”

성욱 “내가 삭았지.”

용현 “엄청 어른스러워서 대화가 돼요. 오히려 얘는 친구들하고 대화가 안 될 거예요. 집안 사업도 불려서 하고 있고, 어린 나이에 굳이 안 겪어도 될 경험들을 하니까. 원래도 편했는데 매일 같이 있다보니 더 느끼는 거죠. 얘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어른스럽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저는 엄청 안쓰럽죠, 스물다섯에.”

박성욱(이하 성욱) “우리 아버지가 막내예요. 저랑 형 집이 제일 가깝고 친척들 다 부근에 살아요. 엄마랑 큰엄마들이 아무래도 (전남광주) 담양에 다 같이 살다보니 제사 때 같이 준비하고, 서로 개인적으로도 많이 만나서. 엄마들끼리 모임 통장이 있어서 돈을 모아 그 전에도 국외 한 번 갔다 왔어요. 그게 너무 좋아서 돈을 모아 또 가게 된 거죠.”

박용현(이하 용현) “분향소 위패 있는 곳에 여행 사진이 있어요. 5명만 나온 사진이 있고 우리 누나만 따로 나온 사진 이렇게 있는데 거기가 우리 집이에요. 큰어머니 세 분, 작은엄마, 엄마, 누나. 아버지랑 작은아버지는 그날 현장에 있었어요. 사촌 여동생, 성욱이 누나도 그때 같이 갔거든요. 미리 마중 나갔는데, 공항에 도착해 주차장에서 딱 내리는데 비행기가 내려오더래요. 그래서 저거 엄마가 탄 비행기다, 동생이 그러고 공항에 쏙 들어간 거예요. 입국장에서 맞이하려고. 아버지랑 작은아버지는 밖에서 담배를 태우시며 있는데, 갑자기 폭발하는 소리가. 처음엔 공항 안에서 가스통 같은 게 폭발한 줄 알았대요. 우리 아버지가 활주로 들어가는 그 길 있죠? 거기로 막 뛰어가니까 직원들이 막더래요, 못 들어가게.

아버지가 정말 목소리가 엄청 떨리시면서 비행기가 폭발했다, 엄마랑 누나랑 탄 비행기가 폭발했다, 그런데 자다가 그 전화를 들으면 되게 생뚱맞잖아요. 짜증을 냈어요. 뭔 소리냐,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그러니까 빨리 무안공항으로 오라고. 우리 엄마는 옛날부터 엄청 꼼꼼하셔서 여행을 가면 안내문이라든가 이런 걸 다 집에 잘 보이는 데다 놔두세요. 혹시 뭔 일이 날까봐. 톨게이트 가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서 일정표가 적힌 종이를 들고 막 가고 있는데 항공편이 뉴스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게 그거였어요. 공항에 가니까 진짜 수도 없이 많은 구급차와 경찰차, 막 난리가 나 있고. 주차가 아니라 차를 던지고 내렸는데 그 타는 냄새, 항공유 냄새. 사람들 다 넋 나가 있고요.

2층인가 3층에서 브리핑을 한대요. 그래서 갔는데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더라고요. 그냥 ‘구조 중입니다’ 하다가 유가족들이 엄청 화가 나서 아니, 뉴스가 지금 당신이 하는 발표보다 더 정확하고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는데 소방대장이라는 사람이 여기 와서 뭐 하는 짓이냐고 엄청 싸움이 일어났어요. 그렇게 1차 끝났다가 두 번째 브리핑을 한다고 해서 저랑 사촌 형이랑 성욱이랑 셋만 브리핑실에 올라갔어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가 울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전원 사망입니다’란 브리핑을 듣고 내려와 1층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이 저기 멀리서 저만 보고 있는데, 그 표정이. 제가 그 옆 주차장에 누워서 오열했거든요. 그날부터 이제 시작이 된 거죠. 저희가 다 엄마가 없어졌으니까. 그러면서 다들 휴대폰 소리에 트라우마가 왔어요, 전화기 소리. 공항에 있는 13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가 오면 오열 시작. 그 소리에 죽을 것 같았어요. 한동안 우리 가족은 휴대폰도 벨 소리를 안 해놨어요. 공항이 살아 있는 지옥 같았어요. 지옥이라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라고 이야기했을 때 가족들이 다 공감했어요.”

 

출국장에서 들은 폭발 소리

 

용현 “누나는 병원 원무과 과장이었어요. 승진해서 그해에 아예 휴가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국장님이 연말에 집에서 좀 며칠 쉬다 와라, 했죠. 엄마는 이미 작은엄마 큰엄마들이랑 여행 계획이 있었고. 엄마가 ‘너도 휴가 못 갔으니까 같이 갈래?’ 하니까 누나가 ‘오케이, 그럼 나 갈게’ 하고 따라간 거예요. 그렇게 갔어요. 그래서 사고 났을 때도 공항에 지인분들 오셨을 때 다 그거부터 물어봤어요. 아니, 은정이는 왜 간 거야? 그런 사정이 있었거든요.

우리 누나가 총 희생자 179명 중에 일곱 번째로 발견됐어요, 첫날에. 그때부터는 ‘제발 살아 돌아와라’가 아니라 ‘제발 발견돼라’,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저는 일단 찾은 게 (다행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신원 확인하러 간 건 누나. 제가 신원 확인 첫 시범 케이스 같았어요. 버스에서 3시간 기다렸어요. 옆에서 소방대원은 계속 시신백 들고 들어가고. 아수라장이어서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 같아요. 딱 들어갔더니, 가방 문을 이렇게 열어주더라고요. 지퍼를 열었는데 누나는 좀 상태가 괜찮았어요. 제가 손발은 다 있나요? 물어봤어요. 거기 국립과학수사연구원분이 ‘죄송하지만 두 발은 없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면봉으로 디엔에이(DNA) 수거해 가고, 저는 공항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탔는데 막막한 거예요. 속으로 ‘누나, 누나가 가신 분 중에 제일 젊으니까 다 손잡아 찾아서 와라, 제발 그래주면 나 너무 고마울 것 같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 발견되셨습니다. 그리고 또 큰엄마 발견했습니다. 아버지가 누나 어떠냐 해서 ‘괜찮아, 누나 괜찮더라’ 그러니까 아버지가 엄마 신원 확인하러 갈 때 따라간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버스를 탔는데, 국과수 직원분이 말리는 거예요. 어머니의 훼손 상태가 현재 신원 확인된 사람 중에 제일 심각하다. 안 보고 그냥 마지막에 좋은 모습만 기억하셨으면 좋겠다. 그냥 유류품으로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했는데 제가 거기서 감정 주체가 안 되니까 욕을 했어요. 나중에 지나가다 공항에서 (그 직원을) 봐서 죄송하다고 했어요.

저희가 절대 지퍼 다 내려드릴 수 없다. 지금 너무 훼손이 심하셔서, 제가 내려드리는 데까지만 해서 본인이 신원 확인만 하세요. 제가 알겠다고,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고. 그런데 이만큼밖에 안 내리는 거예요, 지퍼를. 그분도 안 봤으면 좋겠는 마음에 지퍼를 안 내리는 거예요. 우리 엄마 키가 엄청 작으시거든요, 153㎝. 시신백이 크잖아요. 유류품이 지퍼백에 담겨 있고, 엄마가 한참 밑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유류품이 여기(위에) 있고 키가 작으시니까. 그런데 더 내렸는데 신원 확인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겨우 눈썹 끝 모양. 그다음에 엄마 금니가 있는데, 그게 딱 보여요. 또 유류품에 엄마 생신 때 제가 사드린 스카프가 있었어요. 그래서 엄마 맞고, 아버지는 보지 말자. 보면 안 될 것 같다. 그러고 나왔어요. 나왔는데 멘탈이 나가서 아버지가 오죽하면 아들이 못 보게 할까, 궁금하시잖아요. 저를 약간 의심하셨어요. 누나도 괜찮은 거 맞냐고. 그리고 큰엄마 한 분은 완전 탄화되셔서 확인할 게 없었어요. 그냥 덮어만 놨더라고요. 가서 걷었는데 그냥 진짜 재예요. 재. 뭐 다 태우고 남은 재 있죠? 이거 보고 큰엄마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 이렇게 된 거예요. 이분은 염도 못하신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덮어드렸어요. 조금이라도 덜 탄 조직이 발견되면 거기서 엄청 애써주셨어요. 신원 확인 무조건 해주려고. 사람이 다 탄화돼도 안에는 안 탄 부분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조직 하나라도 찾아서 해주셨던 거예요.”

 

2026년 4월13일 무안국제공항 둔덕(콘크리트) 부근 재수색이 시작되는 날 박성욱씨가 현장을 둘러보는 모습. 박성욱 제공

2026년 4월13일 무안국제공항 둔덕(콘크리트) 부근 재수색이 시작되는 날 박성욱씨가 현장을 둘러보는 모습. 박성욱 제공


 

성욱 “저는 (신원 확인하러) 안 들어갔어요. 형도 안 갔으면 좋겠다 했는데.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서, 형이 마지막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라고 해서 안 들어갔는데 최근 들어서는 갈걸 그랬나, 한 번씩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안 믿겼어요. 장례 치르고 와서 이제 일해야 하니까. 엄마가 우리 사무실 회계 쪽을 맡아서 했거든요. 외적인 거, 활동적인 거를 제가 했는데 이제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하니까. 그 자리에 쓰던 게 다 있을 거 아니에요? 메모지 같은 거랑. 거기서부터 이제 실감이 났죠. 퇴근하고 집에 와 밥해서 먹고 치울 때. 여름에 엄청 바쁜데 아침 일찍 나가서 퇴근해 7시, 8시에 와서 밥해 먹고 설거지하는데 막 눈물이 났어요. 엄마는 어떻게 아침에 일어나서 밥 차려주고 애들 학교 보내주고, 일하고 와서 장 봐 밥해주고 설거지하고 어떻게 지냈을까? 눈물이 막 나는 거예요. 아, 진짜 힘들었겠구나. 그때 실감이 막 났죠.

아버지도 그 자리를 갈 때마다 생각난다 해서 지금 가게를 다른 데로 이전했어요. 그런데 이전 가게, 일했던 자리에 엄마 앉아 있는 데서 제가 가서 이야기하면서 찍은 영상이 있어요. 이상하게 여행 가기 며칠 전에 갑자기 엄마 모습, 그냥 이야기하는 동영상을 찍어놓은 게 있거든요. 왜 찍었는지 모르겠는데 찍고 싶었어요. 엄마랑 장난치는 거, 영상으로 남겨놓은 게 진짜 하루이틀 전이었을 거예요. 이것도 내가 느낌이 있어서 그랬나. 군대 다시 가라고 장난쳤는데.

엄마가 그런 게 좀 있어요. 한번씩 그냥 와서 갑자기 귀 잡아당기고. 내가 아프다고 잡아당기지 말라고. 우리 엄마라서가 아니라, 진짜 남들이 와서도 그러지만 너무 좋은 분이었다고. 지인들 올 때마다 너무 좋은 분이었는데 왜 이렇게 갔을까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느껴도 엄마 같은 사람 없었다. 딱 이렇게 그냥. 저희가 짜증만 냈죠. 철없던 시절에 그 짜증을 다 받아주고 다 원하는 대로 해줬어요. 학교 끝나면 데리러 오라고 짜증 내고, 짜증 내는데도 또 오고. 늦게 오면 왜 이리 늦게 왔냐고 짜증 내는데도 아무 말 안 하고. 학교 다닐 때 집에서 거리가 있으니까 항상 엄마를 불렀거든요. 학교는 읍 쪽에서 한 30분 걸리는데 일하다가 엄마가 데리러 오고 하셨는데. 그런데 제가 그 일을 해보니까 이제 또 알잖아요. 일이 바쁠 땐 바로 갈 상황이 안 되는데. 이제 와서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말이 느껴지는 거죠. 그래서 친구들한테 그 말을 해주지만 게네도 못 받아들일 거예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겠죠. 본인이 느끼기 전에는 모를 거예요.”

용현 “저는 엄마 하면 그냥 딱 집 (생각나요). 아버지도 똑같을 거예요. 엄마 하면 떠오르는 물건 뭐예요, 물어보면 아버지도 이 집이요. 몰딩 하나하나도 다 엄마가 결정해서. 엄마가 엄청 그런 걸 좋아하시기도 하고 꾸미는 것도 좋아하시고. 장례 다 끝나고 집에 딱 오니까 덜컥 겁이 나는 거예요.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 집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갑자기 싹 다 사라졌는데, 여기서 내가 버티고 잘 살 수 있을까?

사실 전출을 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너까지 없으면 나는 진짜 지금 답이 없다, 와서 여기서 학교 다녀라. 그래서 왔는데 그만큼 두려웠죠. 여기서 내가 진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는 원래 타지에 있었으니까 그 핑계로 도피 아닌 도피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어요.

추모공원에 다 같이 모셨어요. 거기는 이렇게 기둥 벽면에 넣어주시거든요. 조금 시간이 지나고 지난해에 아버지랑 작은아버지랑 동생들이랑 술 한잔 다 같이 하다가 야, 살아생전에도 전원주택에서 생활하신 분인데 아파트에서 살면 얼마나 답답하겠냐. 우리가 땅을 작은 걸 해서 가족묘를 만들자, 이분들만을 위해서. 그래서 지금 집 가까운 데로 모셔놨어요.

엄마가 좀 열망이 컸죠. 우리 애들 다 키우면 집 지어서 살자. 엄마의 목표. 아버지가 요즘도 가끔 얘기하시는데, 이렇게 집 다 좋게 지어놓고 살 만해지니까 떠나면 뭔 의미가 있냐. 엄마가 꽃 심고 정원 관리하는 거 되게 좋아하셔서, 겨울 빼고는 나가서 틈만 나면 꽃 심고 물 주고 있고. 엄청 애지중지했어요.

여기 이사 왔을 때는 그런 게 되게 컸어요.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지금 겨울이라 그렇지 봄 되면 진짜 당황스러울 정도로 꽃들이 엄청나게 밀고 올라오거든요. 엄마가 저 타지에서 근무하고 있으면 이 꽃 봐봐, 예쁘지 않냐 이러면서 보내고 그랬는데. 눈을 뚫고 꽃이 올라왔다, 막 이렇게 (카톡) 보내주고.

관리하던 사람이 사라지니까 꽃들이 다 죽기 시작했어요. 화분도 엄청 많은데 다 죽고. 다육식물이며 뭐며 엄청 많았거든요. 게네가 다 아무 이유 없이 말라서 지난해에 화분을 좀 많이 버렸어요. 엄마 있을 때는 꽃말, 꽃이름 팻말이 다 꽂아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난해 가을에 시들고 바람 불고 관리가 안 되니까, 아버지가 싹 뽑아버리셨어요. 마음 아파가지고.”

 

‘무슨 낙으로 사냐’는 짠한 아빠

 

성욱 “아빠도 엄마도 같이 일했지만, 저희는 주 6일 일하는데 일요일 하루 쉬거든요. 우리 아빠는 일요일도 쉬는 날이 아니었어요. 엄마 고향이 고흥인데, 고흥에 큰외삼촌이 농사를 짓고 계세요. 일요일만 되면 엄마랑 아빠랑 단둘이 화물차 타고 새벽 일찍 할머니 집으로 일하러 갔거든요. 아빠가 그렇게 열정적이었어요. 시골에서 벼농사도 했고, 마늘이랑 고추랑 두릅 이렇게 막 했는데. 하우스 창고까지 지어놨어요. 엄마는 새참 만들고 할머니랑 시간 보내고 하죠. 항상 토요일 저녁에 가서 일요일 늦게 오고. 아빠는 쉬는 날이 없었죠. 지금은 아예 농사를 안 지어버리는데 우리 아빠랑 엄마랑 있을 때는 분위기가 엄청 좋았거든요.

이제는 무슨 낙으로 사냐 하시니 아빠도 짠하고. 일요일마다 고흥에 갔던 그때가 엄마의 제일 좋은 모습이었어요. 제일 크게 웃는 모습. 엄마의 엄마를 보러 가니까 엄마도 엄청 좋죠. 저한테도 성욱아 뭐 해, 저녁에 뭐 해, 같이 가자고 하면서. 엄마 항상 웃는 얼굴이었거든요. 딱 할머니 집 갔을 때 엄마, 나 왔어 하면서도. 할머니는 모르세요, 엄마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을. 연세가 있으시니까. 멀리 교육 갔다고만 말해놓고 아직 모르시거든요. 말하면은 충격받아서 쓰러지실까봐. 치매가 있으신데, 가면 항상 내 딸 선임이는 언제 온다냐 그래요, 모르시니까. 아빠는 아직 오려면 멀었어요, 하는데 마음에 걸리죠. 차를 보면 엄마 생각이 나요. 아우디. 엄마가 맨날 사달라고 노래를 불러서 약속했는데, 아우디 노래를 부르면서 살았는데. 못 사준 게 걸려요. 제가 차를 좋아하다보니, 또 생각이 나요. 한 번씩. 아우디 보면 아, 저거 엄마 사줬어야 했는데. 제가 사준 건 아니지만, 그때 딱 차를 바꿨거든요. 그 차도 한두 번 타봤어요. 차 나온 지 열흘도 안 됐을 때 가서. 출고하고 딱 두 번 타봤어요, 두 번. 잠깐 집 앞에서.

그거 타보고 여행을 갔죠. 아빠가 그 차로 (공항에) 데려다줬죠. 지금은 아빠 앞으로 해서 갖고 있죠. 아버지는 잘 안 타시는데 제가 한 번씩 타고. 그때도 1월 말인가 처음으로 대만 가족 국외여행이 잡혀 있었어요. 그것도 못 갔죠. 아버지한테도 첫 국외여행이었죠. 그때 여권을 처음 만들었을 텐데.”

박용현씨 어머니 신복남(왼쪽)씨와 누나 박은정(오른쪽)씨. 박용현 제공

박용현씨 어머니 신복남(왼쪽)씨와 누나 박은정(오른쪽)씨. 박용현 제공


 

억울하고, 진실이 뭔지 궁금하고

 

용현 “지금도 사실 그러거든요. 누나랑 엄마 사진 한 번씩 보잖아요. 그러면 의심해요. 이렇게 안 생겼던 것 같은데? 이렇게 생겼던 분들인가? 신원 확인하러 갔을 때 얼굴 상태밖에 기억이 안 나요. 예쁜 모습이 딱 떠오르면은 진짜 0.1초도 안 돼서 신원 확인하러 갔을 때 얼굴이 딱 덮어버려요. 이제는 정상적인 사진을 봐도 이리 안 생겼던 것 같은데, 어떻게 생겼더라? 계속 그런 생각밖에 안 하고 있어요. 원래 눈이 이랬나? 원래 코가 이랬나? 끊임없는 의심.

저는 올해 몸으로 (타격이) 약간 와요. 1주기 때부터 몸으로 막 치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목 디스크가 터져서 긴급으로 수술했거든요. 1주기 전부터 디스크가 터졌다는 걸 좀 느꼈어요. 증상이 서 있을 수 없는 상황까지 왔거든요. 그런데 1주기 공항을 안 가면 내가 수술을 받고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은 거예요. 공항에서 버티고 버티다가 행사 딱 끝나고 제가 ‘나 도저히 안 되겠어, 이제 가야 해’ 했어요. 원래 마지막에 활주로 걷는다고 했잖아요. 나 못 가겠고 내가 죽을 거 같아. 그래서 성욱이가 저를 차에 태워 병원에 내려놓은 거예요. 가니까 디스크 터져서, 수술하셔야 합니다. 병원에 누워 있는데 계속 서러운 거예요. 이게 뭔 난리냐, 지금.

궁금해요, 저도. 지난해에는 왜 멀쩡했지? 내가 뭐로 견디고 있었지? 그 생각을 많이 해봐요. 무슨 기준이 있어서 버틴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냥 멍하니 살아서 그랬구나. 저는 한 번도 (병원에) 안 가봤어요. 그런데 생각은 있어요. 제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우울을 한번 겪어보니까, 아침에 해 뜨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예요. 낮보다 밤이 좋아요. 휴대폰도 하기 싫어요. 불빛 있는 거 자체가 싫어요. 아침에 해 뜨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커튼을 방에 다 쳐버리고 그때부터 자요. 아침 돼서야 자요. 아버지가 오죽하면 야, 사람이 너무 집에만 있어도 바보 되는 수가 있다, 밖에 바람 좀 쐬러 갔다 와라 해요. 낮에는 안 가고 싶은 거예요. 밤만 되면 성욱이랑 헤매기 시작해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목포 갔다 올래? 바람 쐬러 갔다 오고. 밤에 엄청 싸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한동안.

저희도 사실은 (공항에) 다니기 엄청 고통스럽거든요. 전혀 기분 좋고 추억이 좋은 장소가 아닌데도 저희가 가는 이유는 진실이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요? 엊그제 산소에 갔다가 생각해봤어요. 만약 우리가 이렇게 쫓아다니며 정보를 얻고, 거기서 현실을 목격하고 이런 걸 아예 안 하면 엄마가 엄청 욕하실 것 같아요. 너는 엄마랑 누나가 죽었는데 관심도 안 갖고 신경도 안 써주냐, 이러실 것 같은 마음이 커요. 그래서 최대한 해드리고 싶은 거죠.”

성욱 “국정조사 갔을 때 대답하는 거 보니까 아, 정치가 무섭구나. 그때 실감이 나더라고요. 계속 가면서 느꼈어요. 의원들이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 못하고 죄송합니다, 이런 식으로 제대로 된 답변이 하나도 안 나왔잖아요. 그거 보며 진짜 미친놈들이구나, 자기들이 다 알고 있을 건데 분명히. 유튜브 같은 거 봐도 솔직히 실감 많이 안 나거든요. 그런데 그때 (현장) 가서 보니까 느껴지더라고요. 실감이 나더라고요. 이거 묻는 건 아무것도 아니겠구나.”

 

실낱같은 희망마저 버리지 않도록

 

용현 “언젠간 밝혀주겠지, 국가가 해주겠지? 진짜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그래도 해주겠지. 사조위(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가 와서 지금 열심히 조사 중입니다, 뭐 합니다. 믿음이 가진 않지만 그래, 하고 있다니까. 요만큼이라도 나중에 나와서 알려주겠지. 그냥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어요. 그때 몸으로 느낌이 확 왔죠. 실낱같은 이 희망마저도 애당초 없었구나. 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뭐라도, 요만큼이라도, 하다못해 예를 들면 ‘볼트 하나 때문에 이랬습니다’라고 나중에 얘기해주겠지 했는데. 국정조사 가서 보니까 너희한테 뭘 바랐냐 내가, 약간 이렇게 됐어요. 국정조사를 하고 내려오는 길에 진짜 무섭다, 우리 같은 일개 시민들, 국민은 이 보이지 않는 거대함과의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구나. 얘네들이 절대 우리를 챙겨주지 않는구나. 그런 얘기 하면서 왔거든요. 없던 애국심마저도 더 없어지겠다. 이러니 이런 일 있을 때 한국에서 못 살겠다, 딴 나라로 떠나겠단 말이 왜 나오는지 알겠다.

진짜 좀 쓰레기 같은 말인데, 이태원 참사 때도 사람이 많이 죽었구나,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내 일이 아니니까. 저한테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제가 당사자가 돼봤잖아요. 다 똑같구나. 다른 사람도 그냥 무안공항에서 사고 났대, 딱 그 정도 수준이구나. 내가 그랬으니까. 진짜 무섭다. 잊혀간다는 게 진짜 이런 거고, 또 거대한 국가와의 싸움에서 국가는 내가 이태원 참사를 보며 느꼈던 것처럼 그냥 업무, 그러니까 난 직업이 이래서 어쩔 수 없이 너희하고 이렇게 하는 거지라고밖에 생각 안 하겠구나. 그 뒤부터 더 자주 쫓아다니게 되고, 나 스스로가 아니면 누가 도와주지 않는다는 걸 느껴서. 그래서 기체 잔해를 처음 조사했을 때도 ‘이럴 줄 알았어’ 했어요.

그래도 좀 해놨겠지, 이런 희망이 그 전에는 있었는데, 그래 너희가 그렇지 뭐. 애당초 그런 마음으로 갔어요. 얼마나 또 쓰레기 짓을 해놨는지 보자. 국정조사 이후에는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버리는 사람들이구나. 그나마 전문가니까, 뭐 하나라도. 말 같지도 않은 그 신뢰. 그래야 내가, 우리가 좀 안심될 것 같고, 위로될 것 같으니까.

그런데 보니까 그게 아니었던 거죠. 이미 끝났구나? 벌써 그냥 재개항하려고. 저는 유가족이다보니 무안공항 재개항을 하냐 안 하느냐 따질 시간에 한 번이라도 요즘 무안에 계시는 공항 유가족들의 하루하루 같은 거를 논의해줬으면 참 좋았겠다 싶었는데, 엥? 재개항? 광주공항 국제선 이런 개소리를 하고 있는데 어이가 없었어요. 너무 구체적이었어요, 너무. 참사에 대한 진실보다 어떻게 하면 빨리 이 무안공항을 재개항할까, 그런 것에 시간을 많이 쓰고 있었구나.

여태껏 1년 넘는 기간 동안 공항에 가면 그게 보이잖아요, ‘추모합니다 현수막’. 추모는 하되 (지역은 죽이지 마라). 그거 보고 아, 진짜 미친놈들 많다. 진짜 미친놈들 많아. 이 생각 했어요. 딱 그 현수막이 떠올랐어요. 공항 간다고 하면은, 왜? 물어봐요. 아직도 안 끝났어? 우리는 당연히 유가족이니까 흐름이 빨리빨리 파악되지만 밖에선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몰라서 하는 질문 같아요. 악의적 의도가 담긴 질문이 아니어도 그것을 또 설명하는 게 싫어요.”

전남 무안국제공항 2층 셸터(구호텐트)에 있는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깃발. 유가족협의회 제공

전남 무안국제공항 2층 셸터(구호텐트)에 있는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깃발. 유가족협의회 제공


 

관심 있게 물어봐줄 때 받는 위로

 

성욱 “옆에서 헤아려주려고 하는 것이 싫어요. 네가 고생이 많다. 애써 하는 말 같으니까 그냥. 많이 힘들지? 저는 그 말 안 듣고 싶어요. 내가 원래 알던 사람들이 안 하던 모습 말고 그냥 원래대로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게 저한테는 덜 생각나고 익숙하니까. 차라리 그냥 말을 안 꺼냈으면, 그런 언급을 안 했으면.”

용현 “예의상 물어보는 거 말고 자기도 예의주시하고 있고, 네가 관련된 일이니까 나도 관심 있게 보고 싶어 하는 그 느낌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일단 서론을 깔고 이야기하거든요. 어제 뉴스에서 봤는데 왜 그런데? 뭐가 잘 안 되고 있지? 이렇게 관심 있게 물어봐주는 거, 귀찮게 물어보러 오진 않지만 가끔 계셔요. 그런 분들이. 그러면 저도 옆에 사람이 함께해주고 있구나, 관심 갖고 있구나, 그것 때문에 위로가 돼요. 다 잊어버리고 누군가는 숨기기 위해 아등바등하는데 그래도 옆에 내 친구, 내 동생, 내 선배는 진심으로 같이 욕해주고 신경 써주고 있구나. 그게 좀 위로가 되지, 딴것은 위로가 되진 않아요.”

 

이소아·정나라·허정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활동가

 

*2026년 2월27일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활동가들이 유가족 박용현·박성욱씨를 인터뷰하고 기록했다. 이 글은 ‘무안공항 참사 이후를 사는 사람들’ 9회로, 한겨레21 누리집에서 이전 연재물을 볼 수 있다.

https://h21.hani.co.kr/arti/SERIES/3408

*이 구술기록은 2025년 4·16재단 부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재난 피해자 권리회복사업 지원을 받아 수행된 결과다.

한겨레 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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