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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새’는 어떻게 빌런으로 부상했나

[빌런 놀이] 여성 연대에 대한 ‘실망과 배신’,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기
등록 2024-07-05 11:38 수정 2024-07-09 23:21
최근 유튜브에서 희극인 강유미의 콘텐츠 ‘엑소시스트-남미새 영혼에 빙의된 여자’가 인기를 끌었다. 유튜브 갈무리

최근 유튜브에서 희극인 강유미의 콘텐츠 ‘엑소시스트-남미새 영혼에 빙의된 여자’가 인기를 끌었다. 유튜브 갈무리


“너 누구야!” “남미새요.”

최근 희극인 강유미의 유튜브 채널에서 100만 조회수를 기록한 영상이 있다. ‘남미새 빙의된 내 친구’(이하 ‘남미새 내 친구’)다. 이른바 ‘남미새’(남자에 미친 새X의 줄임말) 악귀에 빙의된 인물을 강유미가 연기했다.

남미새는 지금 시대에 새롭게 부상한 여성 빌런이다. 강유미 콘텐츠 외에도 ‘여자 대부분 공감한다는 남미새 관상’ ‘최강 남미새 특징’과 같은 콘텐츠나 게시글이 인기를 끌고 있다. 내가/친구가 남미새인지 아닌지, 이 정도면 본인이 남미새인지 아닌지 묻는 게시글도 수두룩하다.

남미새→기혼녀→아들맘?

남미새라는 명칭의 특수성은 여자들이 다른 여자를 향해 부르는 멸칭이라는 점이다.(남자가 남미새를 지적할 때는 주로 ‘꽃뱀’ 이미지에 가깝다.) 과거에도 비슷하게 ‘여우’ ‘끼쟁이’와 같은 표현이 있었지만, 특정 행동이나 일부 성향에 국한됐다. 왜 하필 지금 남미새가 문제인가? 남미새는 또 다른 여성 혐오는 아닌가?

남미새는 대체 어떤 존재인가? 먼저 ‘남미새 내 친구’에서 남미새로 분한 강유미를 보면 남미새의 특징은 이렇다. 친구와 약속 시간 전 화장하고 옷을 고르느라 네 시간을 소요하고, 그렇게 입은 옷도 (활동력은 떨어지면서) 몸매가 과하게 부각되는 ‘독기룩’(독기 가득한 패션)이고, 대화의 끝은 무조건 남자친구 얘기이고, 인정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귈 마음이 없는 남사친과 유사 연애를 즐기고, 남자가 있어야만 술맛이 돈다고 한다.

남미새는 대체 왜 미쳐 있는가? 온라인상의 각종 설명을 종합하면 이렇다. 자존감이 낮아 의존할 대상이 필요하고, 자기 능력 키울 생각은 안 하고 남자 능력에 기대려 하며, 취미가 별로 없어 혼자서 시간을 못 보내고, ‘애매하게’ 생긴 탓에 과하게 꾸며야 관심을 받으며, ‘오킴이’(오징어 지킴이의 줄임말)를 자처하느라 다른 여자들을 적으로 여기고, 평소 남자친구를 친구보다 우선시하느라 이별 등 필요할 때만 친구를 찾으면서 심지어 ‘감쓰’(감정 쓰레기통의 줄임말)로 대한다는 것. 심지어 이 증상이 계속되면 ‘남미새→기혼녀→아들맘’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도 한다.

여기서 빠진 질문이 있다. ‘우리’는 남미새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조롱하고 있나? 좋아하던 여성 인플루언서들을 떠나는 여자들이 있다. 이들은 여성 인플루언서들이 연애·결혼·출산한 이후 구독을 취소했다고 한다. 평소 흥미롭고 주체적인 이야기를 공유하는 여성들이었지만 어느새 남친, 남편, 아이 얘기 비중이 높아지는 것에 괴리감 혹은 실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과거라면 없었을 ‘손절’ 사유다. 비슷하게 같이 비연애·비혼을 외치던 친구들이 연애·결혼을 하게 될 때 느끼는 허무함과 서운함을 표현할 때도 남미새라는 단어가 언급된다. 이 실망감과 서운함에서 읽히는 건 사적 친밀감 이전에 서로 여성 시민으로서 거는 기대감이다.

남미새는 ‘페미니즘 리부트’를 함께 통과해온 (특히 결혼 적령기의 시간 압력을 받는) 청년 여성들이 남성과의 결합 여부로 서로의 관계가 재편되는 상황 속에서 부상하고 있다. 지금의 청년 여성들은 남성과 연애·결혼하는 일이 당연하지도 않고 또 문제적이라는 집단의식을 공유해왔다. 그리고 정상 연애·결혼은 필수가 아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남성과 만나는 선택을 해놓고 필요할 때만 여성 연대를 요구하는 건 ‘무임승차’이고, 심지어 비연애·비혼 여성들끼리 공유한 정보나 커뮤니티 자원을 남친, 남편에게 넘겨주는 건 ‘배신’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비연애·비혼 여성 청년의 불안정한 지위

이 인식에는 비연애·비혼 여성 청년의 불안정한 지위가 맞물려 있다. 이들은 전통적 가치를 모르는 미성숙한 어른이면서 ‘잠재적 임출육(임신·출산·육아) 인구’ 취급을 받는다. 수많은 지방자치단체 커플 매칭 프로그램과 결혼·출산 지원 제도가 있지만, 다른 삶을 살려는 여성 청년을 위한 인식과 제도는 없다. 그래서 여성 청년의 현실이 근본적으로는 이 가부장 사회와 남자에게서 온 문제임을 알지만, 애초에 기대가 없던 대상보다 동료 시민이라고 생각했던 동료의 구체적인 상실감이 더욱 피부에 와닿는 것이다. 미투 운동과 4B(섹스·연애·결혼·출산 거부) 운동 이후 ‘모두가 함께 통과해온 시간과 대화는 대체 무엇이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남미새에는 그러한 관계적인 리스크에 대한 피로감도 담겨 있다. 상실로 인한 상처는 서로의 경계를 딱딱하게 만든다. 결국 같으면서 다른 ‘우리’ 사이의 대화는 단절된다.

‘남미새 내 친구’의 결론 부분. 기껏 남미새를 퇴마(退魔)했더니 그 친구(나보람 역)에게 빙의됐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우리 모두 많게든 적게든 이 가부장제에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될 수 있다는 취약성으로 읽힌다.

그러니 남미새냐 아니냐는 질문 이전에 다른 질문부터 해보자. ‘우리’가 정말 남자 때문에 멀어졌나? ‘여미새’는 남성 인권을 후퇴시킨다는 말은 없는데 말이다. 남미새가 여성 인권을 후퇴시킨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나라는 12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일하는 여성에게 환경이 가장 열악한 나라’로 꼽혔다.(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2024년 ‘유리천장 지수’ 참조) 여성이 다른 방식으로 자아실현을 할 방안이 막혀 있는 구조다. 남미새가 의존적이라면, 당장 구조적 변화보다 손쉽게 구체적 관계를 통해 ‘사랑’받을 수 있는 연애 관계를 택하기 쉬운 환경이 문제 아닐까?

그래서 남미새는 여성들에게 이성애-유성애 중심 사회에 간편히 문제 제기할 언어가 되었음에도 또 하나의 검열로 작동한다. 남자를 ‘못 잃는’ 자신의 욕망이 ‘옳은지’ 혼란스러워하고, 그래서 남자친구와 겪는 어려움이 자처한 것이 아닌지, 지금의 처지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탓인지 등 말이다.

모순과 불순도 연대의 조건

여성의 열정은 특히 그것이 남성이나 남초 집단과 깊게 연루될 경우 혐오적 시선이 붙는다. 이 혐오의 역사는 뿌리 깊다. 뮤지션과 섹스를 포함한 친밀한 관계를 맺기 원하는 여성을 칭하는 ‘그루피’(Groupie), 축구나 야구 스포츠 여성 팬에 대해 ‘여왕벌’ 욕심이 있다는 편견, 남자 아이돌과 남자 연예인에 빠진 ‘빠순이’, 정치인 여성 팬덤 ‘개딸’…. 이런 여성 멸칭 계보들과 남미새는 너무도 근접해 있다.

애초에 그런 모순과 모호함 자체가 소수자 연대의 조건일지 모른다. 당장 곁의 친구와 동료로 두기 어렵더라도, 전략적 외교로서 함께 맞설 선택지도 우리에게 열려 있다.

도우리 작가·<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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