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2022년 ‘나락도 락(rock)이다’라는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이 티셔츠나 스티커 등의 굿즈로 불티나게 찍혀 나올 때였다. 지옥을 뜻하는 불교 용어 ‘나락’(那落/奈落)은 몇몇 개인 방송 그리고 주식 커뮤니티에서 실수나 실패를 강조할 때 쓰이다가, 2023년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나락퀴즈쇼’(이하 나락쇼) 인기를 기점으로 대세 밈으로 등극했다.
나락쇼에서는 도살장처럼 시뻘건 조명 아래 진행자(MC)들이 진지한 얼굴로 나타난다. “당신도 언젠가 나락을 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이 쇼에는 입시 전문 유튜버 미미미누, 충북 충주시 공무원 유튜버 홍보맨 같은 셀럽이 소환된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이들에게 ‘대답만 해도 기부가 된다’며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진다. “잼버리 사태, 누구 잘못인가요? ①여가부 ②전북도청 ③현 정부 ④전 정부” 심히 곤란해하는 참가자는 결국 대답에 실패해 기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나락에 빠진다. 이렇게 치명적인 질문일수록, 참가자가 나락에 갈수록 조회수는 치솟는다.
누군가의 실패를 콘텐츠 삼는 건 나락쇼만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극한 상황에 참가자들을 몰아넣으며 주로 유명 유튜버들의 나락행 모습으로 화제를 끌었던 웹예능 <머니 게임>, 화려한 삶의 중심에 있다가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아이돌 등의 근황 인터뷰로 유명해진 <근황올림픽> 등이 있었다. 그리고 100만 유튜버 입장이 되어 논란을 돌파하는 게임 <나락 피하기>, ‘망한 과제 자랑대회’ 등의 행사를 진행한 카이스트 실패연구소의 <실패 주간>, 사회초년생의 실수를 은밀히 세탁해준다는 콘셉트의 엔씨소프트 캐릭터브랜드 ‘도구리’ 팝업스토어 <실수 세탁소> 등 곳곳에서 관련 콘텐츠가 쏟아졌다. 국외에서는 기행과 만행을 저지르는 인간군상을 포착한 이미지나 영상에 ‘#Out of Context Human Race’라는 키워드가 달린다. 나락은 유행어를 넘어 문화가 되고 있다.
실수를 즐기는 콘텐츠 자체는 새로울 게 없다. 계보로 따지면 2000년대 <쇼 파워 비디오> 속 ‘요절복통 해외 비디오’나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몰래카메라’ 코너, 각종 엔지(NG) 모음 등이 존재했다. 과거에는 연예인의 무대 바깥 모습에 대한 호기심이 주를 이뤘다면, 지금은 셀럽이든 일반인이든 그동안 쌓아온 평판이 무너지는 상황에 대한 기대감이 주를 이룬다.
초연결 시대 평판은 점점 까다로운 상품이 돼간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이 많았으면 좋겠어요”가 밈이자 꿈이 된 사회다. 과거 ‘루저’는 음주운전 등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을 때 ‘비호감’ 정도로 여겨졌으나, 지금 디지털 패자는 일반적 행동을 해도 맥락이 소거된 상태에서 가장 최악의 해석이 덧붙여져 존재 자체가 ‘빌런’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흑역사’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온라인 석판에 실시간으로 활성화된 현재로 영영 ‘박제’돼버린다. 언제든 캡처되고 녹음돼 사이버불링(괴롭힘)을 겪을지 모른다. 매 순간이 라이프가 아닌 라이브방송이다. 실패는 곧 나락일 수밖에 없다.
이런 ‘주목 전쟁’의 피로감 속에서 나락 콘텐츠가 도래했다. 특히 나락쇼는 셀럽끼리 현대의 ‘나락 공포’를 안전하게 예행 연습하며 긴장을 해소하는, 일종의 ‘디지털 T 익스프레스’다. 이런 공포는 얼마든지 대중의 일이 되기도 하므로, 충분히 이입해 즐길 콘텐츠다. <피식대학>의 나락쇼와 짝을 이루는 콘텐츠가 유명 셀럽을 초대해 인터뷰하는 ‘피식쇼’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평판의 고도를 높일수록, 나락의 판돈도 점점 커진다. 일종의 ‘나락 부활전’도 가능하긴 한데, 다만 철판 깔고 누구보다도 자신의 나락을 조롱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기후위기·저출생 등으로 인한 인류의 나락, 즉 종말에 대한 정서가 넘실거리는 시대 상황도 나락 콘텐츠 유행에 영향을 줬다. 1990년대 세기말과 다른 점이라면, 종말조차 땅이 잠기듯 한꺼번에 겪는 사건이 아닌 각자도생이 돼버렸다는 거다. 이미 누군가는 망했는데도 낙오가 미결로 지속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추락이 부지불식간에 찾아갈 것이다.
나락 문화 유행을 웃어넘길 수 없는 이유는 정치 혐오가 도사리고 있어서다. 나락쇼의 핵심 나락행 질문은 ‘정치’다. 어떤 셀럽이 출연하든 가장 난감한 표정을 짓고, 시청자도 가장 웃긴다고 꼽는 상황이 정치적 입장을 밝히는 질문이다. 모순적이면서 상징적인 상황이 나락을 좌우하는 게 정치적 용어인 ‘민심’이라는 거다. 나락은 흔히 ‘민심나락’(민심이 나락에 갔다)의 줄임 표현으로 쓰인다.
시위나 시민단체 가입 등 시민으로서의 정치활동은 ‘너무 정치적’이라며 저의를 의심받는 활동이 됐고, 대신 소비자로서 벌이는 보이콧(불매) 운동이나 가혹한 디지털-엄벌주의와 ‘성급한 빌런화’ 문화가 활성화됐다. 메시지나 댓글 기능이 있는 플랫폼이라면 모든 곳이 온라인 민원소나 화형대가 될 수 있다. 모두가 서로를 온라인 자경단원이 아닌지 의심하며 히스테릭해지고, 별점과 리뷰를 관리하기 위한 노동에 시달린다. 그사이 불평등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할 다른 정치적 효능감과 상상력이 무력해진다. 우리네 삶은 ‘GOAT(Greatest Of All Time의 약자로, ‘최고’라는 뜻의 밈) 아니면 나락’이라는 이분법으로 비좁아지고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칼부림 가해자의 “남들도 불행하게 하고 싶었다”는 변명은 그 극단화된 사고방식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처럼 뚜렷한 원죄를 짊어지는 것을 사명으로 삼던 시대는 지났다. 그럼 나락의 시대, 무엇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겨우 셀럽들의 인성 논란이나 방송 <나는 솔로> 출연자들의 폭로전을 보며 ‘시간 순삭’ 콘텐츠로 삼고, 그런 자신을 미워하는 짓을 그만할 수 없을까. 너와 나의 입술이 희망을 달싹일 수 있을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지금까지 소개하지 않은 ‘나락 콘텐츠’로 <우리들의 실패, 실패자들의 연대>가 있다. 2023년 11월10~16일 대학 중심 사회에 저항하는 단체 ‘투명가방끈’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앞두고 연 대학 비진학자 가시화 주간 행사였다. 주류 제도와 문화 바깥의 삶이어서 쉬이 보이지 않더라도, 질기게 심지어 아름답게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그런 작지만 소중한 세계를 지지하는 ‘미련함’을 지켜야겠지, 잠시 흔들리더라도 다시 지켜가야지. 나락 한가운데서 이 마지막 문장을 띄운다.
도우리 작가·<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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