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너 T야?” 밈을 다룬 칼럼(제1476호 참조)을 두고 독자 반응이 뜨거워 놀랐다. 아무리 엠비티아이(MBTI·성격 유형 검사)가 토착화됐다고 명명했어도 어디까지나 재미로 보는 통속 심리학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댓글난에서 진지하게 T(Thinking·사고형)와 F(Feeling·감정형)의 장점을 내세우거나 다른 성향은 깎아내리며 ‘성격 갈라치기’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600개 넘게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댓글은 “진짜 T들은 ‘응, 나 T야!’라고 하지 눈치 안 봄. 뭐 어쩌라고”였는데, 정말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굳이 이런 댓글을 다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을 거여서, 오히려 MBTI가 지금 시대 중요한 정체성의 장소라는 걸 방증했다.
나는 그 댓글들에 거리를 두고 비평가스러운 비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모두가 자신만의 필터 버블에 갇힌 시대, MBTI는 우리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문화 공용어(Esperanto)이지만, 또 바로 그렇기에 우리 모습을 담기에 너무 협소하다는 공감대를 읽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경제와 정치까지 장악한 MBTI에 대해 우리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다.
MBTI가 이렇게 인기를 끈 배경을 다시 강조하자면, 기존 낡은 성격 대본의 대체재였기 때문이다. 나이, 성별, 고향, 학벌, 직업, 애인 유무, 결혼·출산 여부 등 전통적으로 “너는 누구인가”를 식별하는 질문은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됐다. 이 소재들이 개인을 함부로 정의 내리고 차별까지 하는 ‘빅 토크’가 돼버려 스몰 토크라곤 날씨 이야기밖에 남지 않았을 때 MBTI가 부상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또 서로의 성향을 확인하며 합리적이고 평등하며 자유로운 기분으로 16가지 자리에 차곡차곡 소속하게 해주는 MBTI라는 신문물을 기꺼워했다.
그런데 이런 MBTI도 점점 경직돼갔다. ‘INFP’라고 밝히는 건 그저 ‘이상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얻는 일 이상이다. 그 유형의 장단점, 진로와 적성, 잘 맞는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 이상형, 같은 성향의 위인들과 주렁주렁 연결된다. 일종의 성격 대본이자 서사이다. 사람들은 이 서사에 촘촘한 방향을 계속 부여했다. MBTI 유형별 학과 추천, 지브리 캐릭터, 동화 속 포지션, 이별 대처법, 연애할 때 단점, 술주정, 방 청소 상태, 샤워 스타일, 빡쳤을 때, 디폴트 표정, 정신 연령, 일상에 만족하는 순서, 정신병 걸리는 이유, 어울리는 형용사, 고백 방법, 폰 꾸미기 스타일, 필기체, 우는 사람을 봤을 때…. 마케팅업계는 여기에 맞물려 맞춤 상품과 서비스까지 홍보했다. 우리는 매뉴얼화된 캐릭터, 꼭두각시가 돼가고 있었다.
게다가 MBTI는 사적 영역뿐 아니라 사회적 영역까지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건 기업의 채용 공고에 ‘우대사항’으로 특정 MBTI가 언급된 사건이었다. 채용뿐 아니라 조직 내에서도 그저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주고받는 농담을 넘어 동료나 상사, 후배와의 소통이나 협업을 위한 주요 정보가 돼갔다. 각종 사내외 워크숍에서 조직의 팀워크를 향상하고 갈등 예방·해소에 쓰이는 ‘직원 관리 전략’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말을 적용하자면 MBTI는 일종의 치료요법적 담론, 그러니까 “인간관계를 적절한 지식과 이해로 얼마간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문제로 바라보는 심리학의 몰도덕적·과학적 언어”가 됐다.
얼마 전 한 소셜미디어에서 하느님의 MBTI는 J(Judging·판단형)이라는 게시글을 보고 ‘현실 웃음’을 터뜨렸다. 천지창조를 하셨으니, 과연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실행한다는 J 성향과 딱 맞아떨어진다며 끄덕였다. 친구와 나머지 하느님의 MBTI 알파벳을 추론했는데, 우리 둘 다 몇 초도 안 돼 ‘ENTJ’라는 같은 답을 내놓았다. 활발히(?) 세상의 일에 개입하고(E·외향형), 선이라는 의미를 추구(?)하고(N·직관형), 개인별 상황보다는 진실에 초점을 맞춘다(T)는 해석이었다. 친구와 나는 이런 식으로 세종대왕이나 태종 이방원의 MBTI를 추론하며 한참 키득거렸다.
이렇게 정치·사회·역사 인물의 MBTI를 추론하는 일이 웃긴 건 이들을 사적 성향으로 납작하게 만드는 데서 오는 간극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렇게 초시간·초공간적인 인물들도 MBTI를 단번에 추론이 가능한 건, MBTI가 일종의 ‘심리 해부학’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근대 서구 해부학의 발전은 인간의 몸을 기계화·객관화하며 문화권별 몸의 신비와 사상을 해체했다. 이처럼 MBTI는 나와 사람들의 정신을 생물학 교과서에서 외웠던 근골격계, 심혈관계, 뇌신경계처럼 훤히 객관화하는 효과가 있다. 심지어 (살이 없어서 혈액형으로는 분류할 수 없었던) 초인간인 하느님조차 MBTI 분류가 가능하게 됐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웃기지 않다. MBTI는 신조차 끼워 맞출 수 있는 강력한 성격 대본이 되어버렸단 뜻이니까. MBTI를 비판하는 주장들의 결론부는 항상 ‘MBTI에 과몰입하지 말고 고유한 영역에 주목해야 한다’지만, 출근길 버스에서 나를 밀치고 내리는 구체적인 옆 시민에게조차 인내심을 발휘하기 힘든 세상에서, MBTI 외에 타인들의 다양한 면모를 지속적으로 발견하려는 일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분위기다. 심지어 요즘처럼 이상 동기 칼부림이 발발하는 시국에서는 T/F 성향을 따지는 것조차 사치이고 “적이냐 아군이냐”라는 질문만 남게 된 것 같다.
지난 칼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댓글이 있다. “요즘 무조건 공감을 유도하니까 사람들이 마음의 병이 드는 거임. (중략) 사실 우리가 진짜 필요한 건 공감보단 존중임. 상대를 존중하면 공감이란 집단에서 벗어나도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우습게 보지도 않음. 존중은 일상에서 꾸준히 노력하고 연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감정임.”(wbet****)
어떤 성향과 정체성이든 ‘-충’이라는 접미사를 붙여버리는 사회에서, MBTI 말고 다른 성격 유형 검사가 대안으로 떠오르더라도 사회적 존중이 마련되지 않으면 결국 또 ‘성격 갈라치기’로 변모할 것이다. 누리꾼들이 T/F의 이분법에 한계와 불합리함을 느꼈듯 다른 성향과 정체성에 대한 갈라치기 대본도 마찬가지로 재고해야 한다. 성별, 야당과 여당, 피해자와 가해자, 교권과 학생권, 장애인과 비장애인, 자가냐 전세냐,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서울이냐 지방이냐, 정신질환자냐 비정신질환자냐….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공감 집단’을 넘어 어떤 성향이든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 서사가 절실하다.
도우리 작가·<우리는 중독을 사랑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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