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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는 어떻게 우리를 진실에 이르게 하는가

애도받을 ‘자격’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선택하며 ‘우리 모두 상처받음’ 감각 사라져 위기에 처한 공동체… 창작자가 생존자에게 말 걸어야 하는 이유
등록 2024-03-15 22:08 수정 2024-03-20 16:46
2023년 10월28일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시청 앞 분향소를 찾은 가족이 분향하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2023년 10월28일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시청 앞 분향소를 찾은 가족이 분향하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이번 학기 학생들과 이야기 만드는 사람의 동시대적 소명을 ‘애도와 서사’를 주제로 공부해보기로 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사회적 죽음과 애도는 가장 뜨거운 정치적/사회적 주제이다. 세월호부터 이태원, 천안함에서 채 상병 사건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년 반복되는 예기치 못한 죽음과 애도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첨예한 정치적 주제가 됐다.

문제는 애도가 정치적 쟁점이 될수록 동시대의 안타까운 상실에 대한 공통의 경험으로부터 나와 애도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 모두 상처받았음’이라는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애간장이 끊어지도록 슬프지만, 누군가는 전혀 슬프지 않으며 오히려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고 강변한다. 통곡하는 사람들 옆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 먹으며 그것은 당신의 슬픔일 뿐 우리의 슬픔이기를 강요하지 말라는 퍼포먼스를 한다. 광화문이나 서울시청에 있는 추모의 자리가 자신의 쾌적한 삶을 방해한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애도를 강요하지 말라는 강변

천안함에 대한 일부 진보 세력의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를 지키는 과정에서 산화한 분들임에도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며 당시 정권 핵심부는 추모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았다. 일부 ‘진보’ 인사는 지속적으로 음모론을 퍼트리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던 최원일 함장에 대한 모욕적 언사를 남발했다. 사회적으로 애도받을 자격이 있는 죽음을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선택함으로써 우리 모두 상처받았다는 감각 위에 성립하는 정치공동체인 공화국은 위기에 처하게 됐다.

창작은 동시대에 대한 공통의 감각과 밀접하게 연관된 작업이다. 그중에서도 ‘우리 모두 상처받았음’이라는 감각을 시민 모두의 공통감각으로 만드는 작업이 예술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 비극이다. 철학자 김상봉이 저서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예술은 자유로운 시민공동체인 민주주의라는 “공공적 현실을 형성하는 정치적 활동”이었다. 그 민주주의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 죽음이라는 운명에 맞서 자유의 정신을 고양한 영웅이나 무고한 자의 죽음, 그 죽음이 희생자의 개인적인 불운과 사적인 비참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의 상처가 되고 공통감각이 됐을 때 비극이 됐다.

이런 점에서 비극은 개인적 불운/사적인 비참에서 정치공동체의 공통감각을 고양하는 애도의 무대이기도 하다. 비극은 동시대에 대한 공통된 감각이 깨진 자리를 각성시키며 동시대인을 형성하는 불가능한 과업을 수행한다. 애도로서의 예술 창작인 것이다. 학생들과 함께 이 동시대의 상실에 대한 공통감각을 형성(포이에시스·Poiesis)하는 예술의 원래 목적을 시도해보자는 것이다.

애도는 개별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넘어 죽음을 통해서만 발견되는 삶에 대한 보편적 진실에 이르게 한다. 여기에는 여러 층위의 진실이 있다. 1)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는다는 진실. 2) 그러나 모두 죽는다는 말로 다 환원되지 못하는 개별자의 죽음의 이유와 과정. 3) 죽음의 이유와 과정에 살아 있는 자들은 누구나 ‘윤리적’으로 연루됐다는 사실. 4) 그 연루됨을 나는 어떻게 대하 는가에 대한 자신의 윤리에 대한 진실. 5) 그리고 윤리적 주체의 시선에서만 보이는 삶의 진실. 이 진실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애도다. 무엇보다 애도를 통해서만 타자의 죽음을 타자의 죽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윤리적 진실에 도달하며 삶의 진실을 직시하게 된다. 애도야말로 죽음에 슬퍼하는 자를 넘어 그 이후를 ‘살아갈’ 윤리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윤리적 주체의 시선에서만 보이는 삶의 진실

죽음은 절대적이다. 이 절대적인 진실 앞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죽음만이 불변하며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영생하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면 구원은 없는 것이다. 죽음을 경험하며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일체의 의미와 가치, 그 의미와 가치로부터 고양되는 살아가는 힘의 무력함을 절실히 깨달으며 무기력해진다. 그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열려 있지 않은 상황, 그것을 발터 베냐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파국’이라고 불렀다. 죽음은 남겨진 자들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파국이라고 해서 절망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파국일수록 열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구원은 어차피 없으므로 지금 이 순간을 격렬하게 즐기고 살아갈 수 있다. 오히려 허무주의자일수록 현실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 불변하고 불멸하는 것의 상실을 애통해하거나 찾으며 현재를 미래로 ‘유예’하려 애쓰는 일체의 노력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쾌락주의적으로 전도된 ‘카르페 디엠’(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의 필연적 결과다.

그러나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드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그저 무기력하기만 하지 않다. 죽더라도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을 외면한 삶, 즉 냉소적 쾌락주의와 죽음에 대해 체념하는 삶, 즉 허무주의 사이의 선택을 거부하고 ‘죽음 양식’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이며 이 선택에서 인간은 삶을 위해 투쟁하는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호스피스 의사인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저자 레이첼 클라크의 말처럼 “죽을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을 스스로 결정하는 힘”, 이 힘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다”.

죽어가는 자/죽은 자를 대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이 비참이라면 그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죽은 자는 비참하지 않다! 오로지 산 자만이 비참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죽음을 목격한/경험한 자를 비참하게 한다. 그가 슬픔과 자기 연민에 허우적거리며 죽음을 향해 끌려다니기만 한다면 삶을 향한 투쟁인 그 어떤 죽음 양식도 결코 선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가 죽음 양식을 통해 살아가는 자가 되듯이 남은 자 역시 ‘슬픔의 양식’을 통해 이 허무주의를 이겨낼 수 있다. 어떻게 슬퍼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포용하며 선택할 때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경탄하고, 죽어가는 것들에 연민하며 죽음을 넘어 힘껏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생존자’라고 불린다.

쾌락주의나 허무주의 대신 삶 향한 투쟁을

생존자에 대한 이 경탄과 연민의 감정을 회복해야 어차피 모두 죽는다는 허무주의와 냉소주의, 그리고 어차피 죽는 것이니 오늘을 즐겁게 살면 된다는 쾌락주의를 넘어 오늘 살아 있는/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지금 여기를 힘껏 살아가게 된다. 레이첼 클라크는 “슬픔의 고통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뒤집으면 애도는 슬픔의 고통에 맞서는 사랑의 힘의 현존이며 고양이다.

삽화(아래 그림)는 함께 공부하던 신수지 학생이 수업시간에 소개한 트라우마를 다룬 책 <몸은 기억한다>의 한 에피소드를 형상화한 그림이다. 베트남 참전 용사 톰은 제대 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악몽에 시달린다. 견디다 못한 그는 정신과를 방문하고 저자로부터 악몽을 줄이는 효과적인 약을 처방받는다. 일주일 뒤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를 묻지만 톰은 한 알도 먹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유를 묻자 톰은 그 약이 효과가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의 죽음이 헛된 일이 된다며 자기는 “베트남에서 죽은 친구들을 위해 살아 있는 기념비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신수지 학생이 수업시간에 소개한 책 <몸은 기억한다>의 한 에피소드를 형상화한 그림. 신수지 제공

신수지 학생이 수업시간에 소개한 책 <몸은 기억한다>의 한 에피소드를 형상화한 그림. 신수지 제공


이 말만큼 생존자들이 왜 ‘생존자’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비극인지를 잘 드러내는 말이 없다. 애도로 살아가는 생존자의 삶에서 자기 삶은 삭제돼 있다. 그래서 비참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타자를 위해 기꺼이 자기 죽음을 감수하는 정신의 크기를 보여준다. 경이롭다. 그 경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삶을 살지 못하기에 비참하다. 신수지 학생의 그림은 이 점을 의사를 향해 굽은 등으로 앉은 톰, 까만 배경에 겨우 떠 있는 말풍선과 그 안의 작은 글로 그 ‘가까스로 살아 있음’을 잘 표현했다. 최원일 함장과 세월호와 이태원 유가족들의 모습이 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들이 죽음에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 양식을 택함으로써 비참에서 비극으로 도약한 것처럼 애도는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남기를 ‘선택’한 자들의 이야기다. 이렇게 관점을 돌려야 비참 가운데 빛나는 경이로움을 볼 수 있다. 이 경이로움을 본 자만이 애도를 비참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신의 크기를 고양하는 비극적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절정에서 오이디푸스는 왜 자기 눈을 찔렀는가.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는 얼마나 비참한가.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자. 그는 왜 죽지 않았을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잠자리하고 아내이자 어머니는 자살했고 그는 정치공동체에서 떠나게 된다. 이 비참함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왜 죽지 않고 눈을 찔렀을까?

관점을 돌려보면 놀랍게도 그는 삶을 선택했음을 알게 된다. 이런 비참한 일들을 겪고 나면 더는 살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구태여 그것은 그 개별자의 운명으로 예언할 필요도 없는 필멸자인 인간 공통의 운명이다. (그래서 오이디푸스에는 오이디푸스가 자살하게 된다는 예언은 없다.) 그러나 그는 죽음에 당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그 선택으로 그는 신을 이겼다. 구태여 예언할 필요도 없다고 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운명을 이겼다. 그렇기에 그는 눈을 찔린 자가 아니라 눈을 찌른 자가 된다.

눈을 ‘찔린’ 자가 아니라 눈을 ‘찌른’ 자

애도는 상실의 슬픔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도 아니다. 비참에 빠져 절규하고 소리를 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테리 이글턴이 <비극>에서 말한 것처럼 “그 공포에 의지하여 우리 자신의 약점이나 필멸성과 마주하”는 것이다. 마주한다면 마주한 만큼 거리가 생기며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 사태를 관조한 만큼 우리 내면에 그것에 대한 언어가 생긴다. 언어가 생긴다는 것은 이제 소리만 지르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존자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말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죽지 않는다. 그는 말하고 증언하기 위해 삶을 선택한 생존자다. 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생존자는 악몽을 통해 타인의 기념비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자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렇게 애도야말로 공동체가 생존자의 말을 들을 때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고양하는 이야기가 태어나는 자리다. 창작자들이 생존자를 만나는 교실에서 그 비극이 탄생하기를.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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