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으로 가득 찬 ‘혐오범죄’”(2023년 8월 서울중앙지검)
“피고인은 평소 ‘페미니스트는 여성우월주의자로서 정신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쇼트커트 헤어스타일의 피해자가 페미니스트 외모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피해자를 상대로 혐오감을 표출한 전형적인 혐오범죄에 해당”(2023년 11월 창원지검 진주지청)
2023년 한국 수사기관에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2016년 5월 김성민이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살해했을 때, 수사기관과 법원 등이 해당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임을 부정했던 때로부터 7년이 지나서다. 그사이 무슨 일들이 있었나. 2023년 ‘한국형 인셀’들이 시민 대상 테러를 동시다발로 저지른 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y Celibate)를 뜻하는 인셀(Incel)은, 영미권에서 극단적인 여성혐오를 생산·공유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2014년 미국 샌타바버라캘리포니아대학 여학생 클럽 등에 총기를 난사한 엘리엇 로저 사건이 대표적 인셀 범죄로 알려졌다. 백인 이성애자 남성 다수로 구성된 인셀은 ‘매노스피어’(남성이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 ‘남초’ 사이트를 의미) 및 대안우파(인종차별주의, 음모론 등 극단적 정치세력)와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강한 문화적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인셀 테러> 저자 로라 베이츠가 분석했듯, 사회가 인셀을 오프라인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은둔형 외톨이’ 정도로 여기는 동안 일부 남성은 여성혐오를 신념 삼아 급진화한 뒤 흉기와 차량 등을 이용해 사람을 해치는 테러리스트가 돼갔다.
한국에도 이런 인셀의 특징을 보이며 온·오프라인에서 각종 폭력행위를 일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남초 커뮤니티에서 스스로를 소수자/약자/피해자로 규정하며 자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팩트’만 선별해 수용하고 그릇된 가치관을 강화한다. 202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이대남’(20대 남성)을 잡으려 정치권이 행한 일을 돌이켜보면, 서구에서 인셀과 대안우파의 결합이 가져온 파장이 한국에 나타나는 것도 당연하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운, 안티페미니즘을 기조로 한 정권교체 과정에서 한국형 인셀은 자신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과신하게 됐다. 넥슨 등 대기업들이 인셀이 가세한 온라인 트롤링(특정인이나 집단에 가하는 공격적 행위)에 ‘알아서 기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한몫했다. 여성과 페미니스트의 신상을 털고 생계를 끊으며 느끼는 ‘재미’에 도취된 이들은 정작 그들의 삶을 옥죄는 현실 문제를 등한시하는데, 미디어와 정치권 등이 이를 부추기는 모양새다.
이 분위기 속에 2023년 한국형 인셀의 강력범죄가 연달아 일어났다. 7월 경기도 의왕시 아파트 내 엘리베이터에서 박아무개가 처음 본 여성을 폭행하고 강간하려다 검거됐지만, 이를 여성혐오와 연관해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같은 달 서울 지하철 신림역에서 조선이 흉기 테러를, 2주도 지나지 않아 최원종이 경기 성남 서현역에서 차량과 흉기를 이용해 테러행위를 이어갔다. 곧이어 최윤종이 대낮 등산로에서 여성을 강간하려다 살인하고, 11월 경남 진주 편의점에서 박아무개가 쇼트커트인 직원의 머리 모양을 트집 잡아 폭행했다. 여러 남초 사이트에서 이런 테러에 동조하는 ‘살인예고글’이 잇달아 게시됐다. 그제야 언론과 수사기관 등에서 혐오범죄, 테러행위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범죄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에 몰두하는 성향이 있었고, 그런 활동으로 강화한 가치관을 토대로 범행을 저질렀다. 수사·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한 입장에서 봤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피해자를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범죄행위에 대한 온라인 반응, 각 사건의 뉴스 댓글은 여성혐오 실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지표다. 최윤종이 “성관계를 하고 싶어 범행했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건 관련 기사 댓글에는 “성매매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 종종 등장했다. 사회복무요원 소집일에 나가지 않아 재판받아야 하는 당일에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엘리베이터에서 강간하려 했던 박아무개 사건 댓글에는, 박씨를 “의인”이라 칭하며 피해에 비해 선고형량(징역 8년)이 과하다는 글이 이어졌다.
이런 댓글의 등장에는 기사 조회수를 늘리려 인셀과 ‘공생’하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언론은 ‘여성은 군대를 가지 않아’ 범행했다는 박씨의 말을 헤드라인으로 부각했다. 관련 기사들을 보면 박씨가 여동생을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혐의로 소년보호처분을 받는 등 과거 성폭력 행각도 기술돼 있다. 하지만 언론이나 인셀에게 중요한 건 군대였다. 인셀들은 박씨의 행동이 군복무를 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형벌이라고 봤다. 국가에 책임을 묻기보다 여성을 욕하는 게 그들에겐 재미있는 놀이다.
편의점 사건 뉴스에도 가해자를 옹호하는 댓글이 넘쳤다. “(피해자가) 딸 같아서” 가해자의 폭행을 온몸으로 막았던 50대 남성 피해자도 있었지만, 온라인에서는 “페미는 정신병” “페미면 맞아도 된다”는 말을 기계처럼 내뱉으며 폭행을 옹호하는 댓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본인들이 페미니스트라고 ‘좌표’를 찍으면 집단으로 달려들어 온라인 괴롭힘·폭력을 했던 일이 오프라인 폭력으로 이어진 데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들은 자신의 여성혐오,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 등을 오히려 선처를 위한 도구로 활용한다. 엘리베이터 강간상해 사건에서 피고인은 병역법 위반 사건 재판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평소 가지고 있던 여성혐오 감정 등으로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편의점 상해사건 피고인의 변호인도 피고인의 여성혐오, 폭력적 성향 등을 들어 정신감정 유치 신청을 했다. 서현역 테러범 최원종이 정신감정으로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판단을 받아내 선처받으려는 것도, 그가 디시인사이드 등에서 드러낸 혐오/차별적 성향을 조현병으로 인한 망상과 연결하려는 의도다.
인셀이 저지른 범죄를 개인 성향, 정신 문제, 가정환경 등으로 축소하려는 것은 국외에서도 찾아보기 쉬운 가해자들의 공통 전략이다. 이는 미디어가 가해자를 포장하고, 인셀 커뮤니티가 가해자를 숭배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음 편에서는 뒤늦게 대응에 나선 수사기관과 법원의 움직임을 살펴본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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