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방한 소식으로 기대감을 높였던(끝내 못 오고 말았지만) ‘학계 슈퍼스타’ 주디스 버틀러가 미국에서 2022년 11월 발표한 신간이다.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퀴어 연구 중심으로 아시아영화와 시각문화를 강의하는 김응산이 우리말로 옮겼다. 그는 버틀러의 <박탈>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양효실 공역)를 번역했다. 제대로 읽기도 벅찬 버틀러의 책이지만 옮긴이의 사려 깊은 작업 덕에 해제까지 믿고 봄 직하다.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창비 펴냄)는 팬데믹 이후 세계에 대한 윤리와 정치를 다룬다. 이 지구적 감염병은 인간의 신체에 관한 새로운 배움을 줬다. 호흡을 함께하는 공동체 속에서 접촉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실천이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일깨웠다. 누군가를 만지고, 숨 쉬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든 일이 어렵게 된 탓이다.
버틀러는 우리가 공유하는 세상이 ‘공동의 세계’인 듯해도 정작 ‘공동’(the Common)은 아직 달성하지 못한 문제라고 말한다. 팬데믹은 서로에게 가지는 책무가 무엇인지 전 지구적 감각을 고양했지만 인종·경제적 불평등 또한 부각했고 심화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일찍 죽게 되고, 살기 위한 인프라와 사회적 약속은 또 누가 갖느냐다. 백신은 특정 국가와 지역에 우선 배당됐고, 피해는 저개발국과 과거 식민지이던 지역에 극심했다. 감염병 대유행의 정점에서 북미와 유럽 나라들은 방역 조치를 완화하거나 해제했다. 누군가는 일찍 죽을 것이 뻔했다.
“사라진 미국의 전 대통령”(도널드 트럼프)은 “그냥 바이러스가 빨리 돌게 하라!”고 선포했다. 버틀러는 이 말이 취약한 자를 궁지로 내모는 경제우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명령이며 기만적인 죽음의 정치라고 본다. ‘상호 연결된 세계’인 팬데믹 시대에 지구와 생명체의 돌봄을 저버리는 ‘개인적 자유’는 ‘죽음을 퍼뜨릴 권리’를 가진 자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비폭력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구의 죽음만 겨냥하거나 강압 상태 아래 죽도록 내버려두는 정책을 가진 폭력적 제도, 정치, 국가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버틀러는 힘주어 말한다.
<젠더 트러블>부터 <비폭력의 힘>까지 자신의 초기-후기 사상을 연결하며 누구의 삶이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부분에선 뜻밖의 친절함까지 느껴진다. 옮긴이가 해제에서 밝혔듯, 팬데믹 정점 시기 미국에서 심각하게 벌어졌던 아시아계를 향한 폭력 문제를 빼놓은 점은 아쉽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21이 찜한 새 책외국어를 배워요, 영어는 아니고요
곽미성 지음, 어떤책 펴냄, 1만6800원
20년 넘게 프랑스에 살며 프랑스어를 잘하게 되자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은이. 여행 말고는 일상의 쓸모도, 직업적 이점도 없는 외국어 공부를 한다. 한국 친구도, 프랑스 친구도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왜?” 이탈리아어라고는 알파벳밖에 모르던 그가 1년 만에 이탈리아어로 전자우편까지 주고받기에 이르는데….
녹색평론 2023년 여름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1만7천원
1년6개월 동안 휴간한 <녹색평론>이 격월간에서 계간으로 바뀌어 나왔다. 창간 30년을 넘기면서 역사적·사회적 역할이 달라져야 할 것으로 봤다고 편집부는 밝힌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평화 문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감염병과 기후위기 시대의 공공의료, 서평 등을 실었다. 복간호를 맞아 보낸 독자들의 메시지가 뜻깊다.
미르의 공장 일지
김경민 지음, 숨쉬는책공장 펴냄, 1만5500원
20대 여성 노동자 미르가 2018~2020년 공장에서 일하며 적은 일지 140여 편을 담았다. 일식집에서 일하던 지은이는 공장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한 대기업 하청 공장에서 출근할 수 있냐는 연락을 받고 그곳으로 향한다. 불법이 일어나는 공장, 악의 없이 여성성을 강조하는 사람들, 계약직의 비애까지 생생하게 기록된다.
처방전 없음
홍종원 지음, 잠비 펴냄, 1만6800원
‘남의 집 드나드는 의사’ 홍종원의 첫 단독 저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역할을 고민하던 그는 무작정 지역사회에 뛰어들었다. 방문진료 전문의원 ‘건강의집의원’을 열고 아픈 이들을 찾아다니는 의사가 됐다. 독거노인, 이주노동자, 쪽방촌 사람 등 사회에서 소외된 아픈 사람들과 나눈 우정과 환대의 기록이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관저 유령건물 의혹에 “스크린 골프 검토했다 취소” 말바꿔
[영상] 박정훈 대령 “윤 격노는 사실…국방부 장관 전화 한 통에 엉망진창”
“교단에 서는 게 부끄럽다”…‘나는 왜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나’
푸틴 “우크라에 ICBM 아닌 중거리미사일 발사”…러 “미국에 사전통보”
음주운전·징계도 끄떡없던 강기훈 행정관, 결국 사의 표명
“우크라군, 러시아 ICBM 발사”
[단독] “창고→경호시설” 의혹 더 키운 경호처…그럼 왜 숨겼나
관저 ‘유령 건물’의 정체 [한겨레 그림판]
[속보] 우크라 공군 “러시아, 오늘 새벽 ICBM 발사”
성범죄 의혹 미 법무장관 후보 사퇴…국방장관 후보 성폭력 내용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