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흥행 이후 성수(가명)의 마음은 한동안 지옥이었다.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에게도 끔찍한 학교폭력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복수가 정의를 바로잡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사자에게도 증인이 필요하고, 증인이 되려는 사람에게도 증인이 필요하다. 정의로운 행위가 되려면 진실성과 정당성이 증언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폭력의 증인인 그에게는 증인이 없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고등학생 때였다. 성수와 친하던 수훈(가명)은 흔히 말하는 ‘자기 세계에 빠져 사는’ 기질이 있는 친구였다. 학급의 권력 지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사건이 터졌다. 주먹을 쓰는 친구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웠다. 다들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수훈이 “조용히 해달라”고 말했다. 교실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한 명이 수훈에게 다가갔다. “‘XX 새끼’라고 생각해서 봐줬더니 기어오른다”며 협박했다. 수훈에게 협박이 통할 리 없었다. 수훈이 말대꾸하자 그는 양동이를 가져와 수훈의 머리에 씌우고 교실 뒤편으로 끌고 가며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다른 학생들에게 뭘 쳐다보냐며 앞으로는 너네도 ‘국물’도 없다고 소리 질렀다.
그날 교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다음날 수훈을 볼 수 없었다. 제법 시간이 지난 뒤 수훈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타났다. 수훈은 수업 시간이며 쉬는 시간에 횡설수설했다. 히죽히죽 웃거나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원래 존재감이 있던 친구는 아닌지라 다들 아무렇지 않았던 건지 애써 무시한 건지 몰랐지만 그 변화를 감지한 것은 성수뿐인 듯했다. 얼마 뒤 수훈은 학급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역시 아무도 그의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성수는 그 사건이 자신에게 폭력에 대한 원형적 경험이라고 말했다. 정확히는 폭력 자체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폭력을 다루는 한국 사회에 대한 경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수훈이 머리가 깨지도록 맞던 날 교실의 침묵, 그리고 그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타난 수훈을 대하던(사실은 대하지 않던) 친구들의 모습, 수훈이 사라진 뒤 누가 사라졌는지 의식하지 못하던 교실의 모습. 성수에게는 그것이 더 큰 충격이고 폭력이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성수는 이 사건에 대해 친구들과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친구들은 어떠했는지 알고 싶었다. 다들 자기처럼 비참함과 굴욕감, 미안함과 수치심을 안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 몇 명에게 용기 내어 물었다. 돌아오는 친구의 대답에 그는 경악했다. “어, 우리 반에 그런 일이 있었냐?”
기억하는 친구가 없었다. 그 사건도 수훈도 기억하는 친구가 없었다. 순간 성수는 그 사건이나 수훈을 자신의 환각 속에 만들어낸 게 아닌가 해서 몸이 휘청거렸다고 한다. 절박한 마음으로 수훈을 설명했다. 어떤 친구였고 피부색이 어떠했고 머리에 붕대가 어떻게 묶였고. 성수가 한참 설명하고 나자 친구들은 듣고 보니 생각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고 대답했다.
성수에게 그 사건은 30년간 악몽이었다. 폭력의 그날 교실의 침묵에는 자신도 포함돼 있었다. 잠시 다시 나타난 수훈을 걱정했지만 먼저 다가서지 못하고 수훈이 다가설 때마다 움찔하던 자기의 모습은 지난 시절 내내 수치였다. 그날 느낀 ‘절대적’인 폭력 앞에서의 무력감, 그리고 용기 내지 못한 자신을 향한 수치심에 일상에서건 뉴스에서건 ‘폭력적’ 사건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얼어붙었다.
성수는 자신이 폭력으로부터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폭력을 당하더라도 자기에게 힘이 없다면 그냥 사회에서 지워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 폭력에 무력하고 무감한 사회의 가장 ‘좋은’ 대처는 피해자를 지워버리면서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리는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수는 그 사건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회생활에도 늘 그런 모습을 보고 경험한다고 했다.
성수의 말처럼 폭력에 무능하고 무감한 사회의 폭력은 중층적이다. 첫 번째로 존재를 파괴하는 폭력이 있다. 수훈이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의 존재를 위협하는 폭력은 인류사에 늘 있었다. 전쟁에서의 학살, 그리고 일상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늘 존재에 위협받고 살았다. 동시에 이 폭력에 국가나 사회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폭력이 저지되거나 중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을 저지/중단하기 위해 피해자/희생자를 애도하고 폭력을 기억한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폭력을 저지/중단할 힘과 의사가 없는 사회는 사건 자체를 지워버린다. 없던 일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두 번째 폭력이다. 이 폭력은 존재를 파괴하는 것을 넘어 존재를 말살해버린다. 전자가 일본 군국주의가 중국 난징에서 ‘목 베기’ 경쟁을 하며 저지른 학살과 같은 폭력이라면, 후자는 독일 나치가 아우슈비츠에서 자행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던 폭력이다. 일본 군국주의는 그 잔인한 폭력을 신문으로 보도하며 ‘자랑’했지만, 나치는 만일 시간이 충분했다면 말살했다는 흔적조차 지워버렸을 것이다.
존재를 ‘말살’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것은 ‘망각’이다. 성수처럼 홀로 기억하고 되새기며 무력감과 수치심의 악몽에 빠진다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서서히 붕괴하고 어떤 이는 급격히 무너진다. 트라우마가 심할 때는 사건이 벌어진 그 시간에 ‘박제’돼버린다.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하며 만들어가는 것으로서의 ‘생애’가 불가능해진다.
트라우마 전문 정신과 박사인 베셀 반 데어 콜크가 쓴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에 대표 사례가 나온다. 베트남전에 복무했던 톰은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저자는 악몽에 시달리는 톰을 위해 약을 처방했지만, 톰은 약을 먹지 않았다. 왜 약을 먹지 않았냐는 물음에 톰은 그 약을 먹으면 악몽이 사라지고 악몽이 사라지면 베트남전에서 죽은 전우들도 사라진다면서 “전 베트남전에서 죽은 친구들을 위해서 살아 있는 기념비가 되어야 해요”라고 말한다. 시간에 포박돼 생애를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폭력에 무력하고 무감한 사회에서 무력한 개인은 망각한다. 비겁한 행동이기도 하고 폭력적 태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망가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생존 수단이기도 하다. 망각은 차라리 그 사건을 잊어버림으로써 그 사건의 시간에 박제되지 않고 탈출할 수 있는 무력한 자의 대처법이기 때문이다. 망각은 그 대가로 우리 삶이 이야기가 되기 위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건과 장면을 지워버린다.
감당할 수 없는 폭력을 행사한 뻔뻔한 자들도 망각하고, 방조한 비겁한 자들도 망각하고, 무력한 자들도 망각한다. 그러나 망각이 아무리 전능하더라도 ‘모두’에게 그럴 수 없었다. 그 무력에 절감하며 전율한 일부 ‘무력한 자’가 남았다. 이 ‘무력한 자들’이 사별자로서 폭력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애도하려 할 때 세 번째 폭력이 가해진다. 애도하려는 이들을 귀찮고 불온한 자로 취급하며 세상에서 고립시키는 폭력이다.
존재를 파괴하는 폭력과 존재를 말살하는 폭력에 이은, 망각하지 못하는 존재를 고립시키는 폭력이다. 그러므로 존재를 파괴하고 말살하는 폭력에 대해 증언자가 된다는 것은 곧 세 번째 폭력의 생존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성수 같은 사람은 폭력에 무력한 사회에서 세 번째 폭력으로 인해 폭력의 증언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폭력 피해의 당사자가 된다. 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집요하고 지속적으로 당해야 하는 폭력이 있기 때문이다.
망각하지 않고 이야기 꺼내는 것을 불온한 일로 취급하기에, 잊지 않으려는 자는 반복해서 그 사건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다. ‘그날’의 증인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과거에 매여 사냐고 한다. 그만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잊지 않으려는 자는 ‘그날’을 빼고 나면 자기 삶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없던 일로 치고 생존자가 자기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날 그 교실의 침묵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성수가 자기 삶을 말할 수 있을까. ‘그날’이 그가 한국 사회와 친구들과 무엇보다 자신의 가장 어두운 치부를 응시한 날인데 말이다.
여기에 네 번째 폭력이 있다. 폭력을 기억하겠다는 결심이 망각하지 않은, 망각할 수 없는 이들을 그 사건에 묶어 ‘기념비’로 만들어 유폐하는 폭력이다. 사별자들이 사건 이후의 삶을 생존자로 살아왔다는 것에 관심 두지 않고 ‘그날’에 대한 증언에만 그들을 포박함으로써 생존자의 이야기는 봉쇄해버리는 것이다. 잊지 않겠다는 것이 사별자의 삶을 죽음에 박제해버린다면 그보다 더 참담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가뜩이나 사별자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이런 죽음이 일어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세계 전체가 부조리해지고 부당한 공간이 되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도 부조리한 존재로 보인다. 그는 이 부조리한 세계 안의 자신을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을 ‘그날’의 기념비로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가능한 정당성 있는 일로 여긴다.
그런데 함께 기억하겠다는 사람들이 사별자를 ‘그날’의 기억에 묶어버리기도 한다. 그 기억이야말로 이 세계의 부당함과 부조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정의’를 위해 타인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증거로 반복한다. 이건 연대가 아니라 폭력이다. 누구의 삶도 정의를 위한 기념비가 돼서는 안 된다.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를 우회해 말한다면 정의를 위해 희생되는 품위와 존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폭력은 파괴, 말살 그리고 고립이라는 앞의 세 가지 폭력과는 완전히 다르다. 앞의 세 폭력이 ‘망각’을 강요한다면, 이 폭력은 잊지 않겠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잊지 않으려다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별자의 잘못이 아니라면서 그들을 기념비로 묶어두고 기억에 유폐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을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잔인한 폭력이다. 애도와 연대는 사별자가 자신을 기념비로 유폐하려는 것에 함께 부딪치며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이지 동조가 아니다.
망각에 맞서 기억을 약속하는 사회의 품위는 사별자가 죽은 이에게 가해진 폭력뿐만 아니라 생존자로서 자기 삶을 증언하도록 말을 걸 수 있는지에 달렸다. 사회적 참사에 책임지지 않기 위해 ‘사회’라는 말을 붙이는 것을 끝까지 거부하고, ‘귄위를 가진 주체’가 국가폭력의 희생자에게 그나마 표하던 의례조차 건너뛰어 희생자와 사별자 모두 모욕을 느끼는 퇴행의 시대라면 더욱 그렇다. 이 퇴행의 시대, 존재를 파괴하거나 말살하거나 혹은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거나 유폐하는 폭력에 맞서 정말이지 기억과 애도로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전세계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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