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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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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 한국인은 왜 ‘반미’가 됐나

유럽 여성 인류학자가 본 주한미군의 파문과 광경 <동맹의 풍경>
등록 2023-04-07 14:03 수정 2023-04-12 23:01

무려 70년이다. 한국과 미국은 자타공인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굳건한 동맹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주한미군은 ‘우방국 친구’이자 ‘강국의 가해자’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사회인류학 교수 엘리자베스 쇼버가 쓴 <동맹의 풍경>(강경아 옮김, 나무연필 펴냄)은 주한미군과 한국인이 접촉한 곳에서 어떤 파문과 광경이 나타났는지 살핀 책이다. 2007년부터 한국에서 현장조사를 진행하며 주한미군, 기지촌의 성매매 여성들, 이태원과 홍대의 한국인 등을 만났다.

지은이는 유달리 친미 성향이 강했던 한국인이 느닷없이 반미감정을 갖게 된 이유를 궁금해하며 조사를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적대감의 밑바닥에 민족주의와 젠더 문제가 있었다. 1992년 기지촌 성매매 여성이었던 윤금이씨가 살해된 사건은 주한미군을 가해자로 설정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지은이는 세계 민족주의 내러티브에서 ‘국토’가 줄곧 ‘여성의 신체’와 동일시된다고 설명한다.

이 책에서 가장 독특한 분석은 2000년대 이후 미군과 한국인이 만나는 ‘공간’의 이야기다. 일시적 영역에서 일상이 재조정되고 예상치 못한 동료애가 생기는 ‘코뮤니타스’ 감각이 서울 이태원과 홍대 일대에 형성됐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용산 일대가 남성들이 영토싸움을 벌이는 곳이자 잠재적 섹스 파트너를 구하기 위한 다툼이 가득한 곳이라 보고 이를 ‘이태원 서스펜스’라 일컫는다. 2000년대 초 홍대 또한 미군의 유입으로 ‘홍대 양공주’라는 멸칭이 등장하는 스캔들의 공간이 됐다. 그러나 무정부·반군사주의 좌파 펑크족이 홍대에 나타나고 이들이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대추리 투쟁에까지 발 들이는 점을 짚으면서 좌파 펑크족은 기존 민중운동가의 이념적 경로에서 벗어난다고 분석한다.

지은이가 한국인의 반미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거나 미군 범죄 문제를 ‘폭력적 상상’이란 개념으로 진단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든 독자가 있겠다. ‘폭력적 상상’이란 개인 폭력을 국가 문제로 재구성해 이해하는 관행을 가리킨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상상인가. 중요한 점은 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착취에 포함되지 않는 이야기가 배제됐다는 데 있다. 예컨대 기지촌에서 일하는 외국인 여성의 목소리 같은 것. 이래저래 그간 주한미군 문제에서 젠더 이슈를 배제해온 민족주의 좌파에게는 꽤 뜨끔한 책이 될 것 같다.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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