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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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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저는 또 이 일을 하겠습니다

축복 뒤 감리회 자격심사위에서 취조를 방불케 하는 심리, 주위에선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조언했지만
등록 2022-10-26 16:03 수정 2022-10-28 09:45
이동환 목사(가운데)가 2022년 10월20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해 응원받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이동환 목사(가운데)가 2022년 10월20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열린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해 응원받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2019년 8월31일 제2회 인천퀴어문화축제 무대에 올라 ‘함께하는 축복식’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교단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나라를 전라도, 경기도 등으로 나누듯 감리회에선 ‘연회’로 지역을 구분한다. 이동환 목사가 담임하는 교회는 경기도 수원에 있어 경기연회에 속했다. 경기연회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과정 자격심사위원회’(이하 자격심사위)에서 동환을 호출했다. 다른 연회 두 곳에서 고발장이 날아들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그 뒤 동환은 수차례 자격심사위에 불려다녔다. 그를 가운데 앉혀두고 10명 가까운 위원이 압박 면접이나 취조를 방불케 하는 심리를 펼쳤다고 했다. 어느 날엔 평소 동환을 좋게 봤던 선배가 전화로 “내가 다 이야기해놓았으니 잘못을 빌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만 하라”고 조언했다. 교단은 어지간해서는 목회자를 징계하기 꺼린다. 어른들 입맛에 맞춰 고분고분하게 굴면 재판까지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동성애는 죄이며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축복식)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내야 했다.

그 목사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동환과 내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에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교인들에게 알린 성소수자가 있었다. 동환은 매주 예배에서 그 성소수자 교인을 포함한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축복기도를 했다. 우리 교인들은 각각 성별이 무엇이고 누구를 사랑하는지에 관계없이, 서로의 다름을 배워가며 평안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성소수자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폭력적인 경험을 많이 하는지, 유독 자주 가까운 사람의 부고를 접하는 그 성소수자 교인을 보며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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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애초 동환에게는 매주 교회에서 하는 축도와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베푼 축복식이 다르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 도리 또한 없었다. 그는, 자격심사위에서 요구받은 각서를 쓴다 해도 그것은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일이며, 목회자로서 어떤 축복기도 요청이 오더라도 거부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사회 속에서 편견과 차별로 핍박받는 사람들이 모여 또다시 하나님의 복을 필요로 하며 목회자를 찾는다면 지체 없이 달려가겠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어느 존재에게나 조건 없이 가득 차는 것이니까. 다만 그는 이런 일로 목회자를 징계하는 것이 옳은지,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법조항 자체가 과연 기독교의 교리에 합당한지 다시 한번 논의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자격심사위에서 그를 심문하던 고령의 목사는, 우리 교회에 있는 성소수자 교인에게 성경을 보여주며 동성애가 어째서 죄인지 조목조목 가르쳐, 그를 죄로부터 돌이키게 해야 했다고 동환을 나무랐다. 그 목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목회하는 교인을 차근차근 영혼이 죽어가도록 만들라는 뜻이었다는 걸. 편견으로 가득 차 마음이 굳어진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동환이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계속 만나게 될 교계 어른들이 또 얼마나 편견 어리고 폭력적인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헤쳐나갈지 전략이 필요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결정해야 했다. 우리가 어디까지 내다보고 무엇까지 감수해야 할지를. 최악의 경우 그의 이름이 교회 안에서 지워질 수 있었다.

2020년 6월24일 서울 광화문 감리회관 건물 앞 마당에서 연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모습.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 제공

2020년 6월24일 서울 광화문 감리회관 건물 앞 마당에서 연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모습.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 제공

한 신학자의 삶을 뽑아 버린 종교재판

동환이 겪을 교회 재판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감리회 역사에 크나큰 상처로 남은 희대의 재판을 언급하고 넘어가야 한다. 내가 속한 기독교대한감리회에는 토착화 신학이라는 중요한 학문적 맥락이 있다. 쉽게 말해 ‘한국적 신학’을 하려는 노력으로, 미국 선교사가 들고 온 외국 신학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의 문화와 전통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선교사를 따라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여기지 않고 처음부터 우리가 사는 곳에 함께 있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종교적 토양인 유교와 불교, 무속신앙에 기독교를 접목하거나 대화하며 신학을 연구했다. 이런 신학을 배우고 토론하는 환경은 감리회 신학생들에게 큰 자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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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종교 간 대화를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았다.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선교를 하는 이들에게 토착화 신학은 ‘사탄의 역사’였다. 그러던 1992년 5월7일 한 대학의 학장이기도 한 신학자가 이른바 대형교회를 일군 이들, 권력을 가진 이들의 손에 종교재판에 세워져 출교됐다. 그는 “기독교는 더 이상 정복자의 종교가 아니며 전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종교 간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했다. 국외의 유수한 신학자들이 탄원 성명을 보내오고 그의 제자들이 맞서 싸웠지만, 변변찮은 심리나 신학 다툼조차 해보지 못한 채 그는 감리교 밖으로 쫓겨났다. 신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내며 선생이자 목사로 평생 뿌리내린 삶이, 한순간 송두리째 뽑혀 버려졌다.

2003년 내가 감리교신학대에 입학했을 때, 학교는 여전히 출교당한 학장에 대한 상처를 품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지만 종교 간 대화와 토착화 신학의 학풍은 크게 위축됐다. 새로 임용되는 학자들은 ‘쫓겨난 학장의 신학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서약해야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유례없는 종교재판이 벌어진 지 30년이 흘렀지만 ‘출교당한 신학자’ 고 일아 변선환은 복권되지 않은 채 지금도 낙인찍혀 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종교재판의 위력이다.

후보생의 사상검증 도구로 쓰이는 조항

동환은 가장 먼저 내 뜻을 물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얼마나 오랫동안 겪을지 모르니 운명공동체인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멈추겠다고 했다. 우리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고 신학교에 진학해 공부하며 어느새 우리 삶의 생태계가 되어버린 감리회였다. 이젠 그 감리회 안에서 규모를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적대감과 마주해야 했다.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일은 이제 한 개인이 목사로서 퀴어축제에 가느냐 못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2015년 감리회의 기본법인 ‘교리와 장정’ 제3조 8항의 개정(동성애를 마약이나 도박 같은 범죄로 취급)이 얼마나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지 드러내는 일이었다. 개정 직후 ‘감리교 퀴어함께’가 조직돼 규탄했지만 되돌리지 못했고, 이후 유령처럼 작동하며 목사로 진급할 후보생에게 사상검증 도구로 쓰이는 조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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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내가 이 싸움에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함께 싸우기로 했다. 뜻있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면, 다시는 감리교가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처벌하는 일이 없도록 건강한 공론장을 열어 법을 바꿔내는 운동을 하고 싶었다. 아니 적어도 그 운동의 한 부분을 시작하고 싶었다.

여러 동지, 신학교 동문과 교계 선배들의 조언이 있었다. 각오만으로 될 일인지, 큰 스트레스를 견딜 정신적 체력이 있는지부터, 이미 한 줌의 규모로 일당백을 하는 감리교의 운동권 동지들이 함께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판단해야 했다. 최악의 상황으로 출교 처분이 난다면 다시 복권되기까지 어떻게 버틸지, 감리교 내 성소수자와 앨라이(차별에 반대하는 연대인)에게 이 재판이 어떤 의미가 될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출교되면 살아서는 복권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 선배는 동환이 감리회 내 동지들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다. 상처가 됐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 싸움은 일차적으로 동환의 싸움이고 우리 부부의 결단이지만, 결국 연대하는 모든 이의 싸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관적인 전망에 서운했고, 운동적 비전을 몰라주는 마음에 야속했다. 하지만 어떤 자신만만한 청사진도 제시할 수 없었다. 오히려 교회 내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상처받는 성소수자의 현실과, 혐오에 가득 찬 교단의 폭력이 더 실감 나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이대로 멈출 수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많은 우려에도 우리는 싸우기로 했다. 동지들이 모였다.

둘만의 ‘우리’에서 대책위 ‘우리’로

2020년 6월17일 처음으로 이 사건이 교계 대중에게 알려졌다. 기독교계 언론매체 <뉴스앤조이>의 기사를 통해서였다. 기사에는 동환이 결국 재판위원회에 기소됐다는 소식도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그 전까지 나와 동환이 ‘우리’였으나, 이제는 동지들과 함께 꾸린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가 ‘우리’였다.

우리는 그해 6월24일 서울 광화문 감리회관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하필 장마로 장대비가 내렸다. 천막을 빌려 설치했고 동지들의 몸과 옷이 홀딱 젖었다. 100명 넘는 연대자가 모여 자리를 지켰다. 지난 축복식 때 꽃잎을 뿌렸듯 계속 축복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담아 색종이 꽃가루를 준비했다. 색색의 꽃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전쟁에 나가는 듯한 두려운 마음과 서로를 의지하는 다부진 용기로 가슴이 시큰거렸다. 이제 시작이었다. 반갑고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우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두려운 길을 나섰다. 머지않아 이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리라 믿으며.

노랑조아(김은선) 믿는페미 활동가

*2022년 10월20일 항소심 기각 판결에 따라 이동환 목사에게 정직 2년 처분을 내린 원심이 최종 확정됐다. 감리회 재판은 사회 재판과 달리 2심제다.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 ‘믿는페미’ 활동을 하는 노랑조아(김은선)가 배우자 이동환 목사와 함께 교회 내 성소수자 혐오, 가부장성에 맞선 이야기를 전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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