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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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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워봐라, 내가 치워지나’ 천막에서 차 소리 들으며 잠든 밤

‘밀어내봐라, 내가 밀어지나. 치워봐라, 내가 치워지나’
천막에서 차 소리를 들으며 잠든 광화문 그 밤, 오기가 돋아나다
등록 2023-01-06 00:10 수정 2023-01-06 20:11
2021년 6월21일 서울 광화문 감리회관 앞에서 농성에 들어가기 전 기자회견을 하는 이동환목사 공동대책위원회.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 제공

2021년 6월21일 서울 광화문 감리회관 앞에서 농성에 들어가기 전 기자회견을 하는 이동환목사 공동대책위원회.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 제공

교회재판은 형벌 같았다. 무엇보다 의지대로 일상을 계획할 수 없다는 점이 우리를 괴롭혔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일반재판법에 따르면 재판은 2개월 이내에 판결하게 돼 있다. 2020년 10월 1심 판결을 받고 항소했으니 2심 재판은 적어도 12월 안에 마무리돼야 마땅했지만, 항소심을 관할하는 총회재판위원회의 위원장이 동환을 고발한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재판을 자진 회피한 뒤부터 도무지 기일이 잡히지 않았다.

2021년의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법적 재판기간에서 한참을 넘어가도 재판위가 감감무소식이자, 앞으로의 일정을 가늠할 수 없어진 나와 동환은 일상에 집중할 수도 재판에만 골몰할 수도 없었다.

다음 세대를 앞에 두고 “다음 세대에는…”

그러던 중 감리회의 최고 수장인 감독회장과의 면담이 잡혔다.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대책위) 멤버들이 동환과 함께 감독회장을 만나 항의서한을 전달하고, 부디 이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힘써달라고 요청했다. 더불어 감리회에서 성소수자에 관한 신학적·목회적 연구와 논의가 진행되도록 ‘성소수자 목회 연구위원회’를 설치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철 감독회장은 “이 사안(성소수자)을 우리가 다루기엔 너무 이르며 우리 다음 세대, 아들 세대가 (성소수자 관련 연구와 논의를) 다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목사님 아들 세대가 지금 여기 있는 이동환 목사예요!” 내가 외치자 감독회장이 동환의 나이를 물었는데, 역시나 그의 자녀는 동환 나이 또래였다. 이미 그가 말하는 다음 세대가 눈앞에 있었지만 그의 세계는 현재를 살아가는 성소수자와 앨라이(차별에 반대하는 연대인) 크리스천의 현실에서 너무도 동떨어졌고 그 심정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별 소득 없이 돌아온 우리는 야식으로, 운동으로, 또는 기도로 다 풀어내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는 내가 동환의 손을 이끌고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동환은 약을 처방받아 먹고, 개인상담을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개인의 힘으로 이 불안한 일상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나 또한 어느새 감리회 빌딩 꼭대기에서 유인물을 뿌리며 투신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마음이 더 무너지기 전에 상황을 바꿀 탈출구가 필요했다.

동환은 그동안 ‘감리회의 선교를 방해한다’는 질책을 받아왔다. 성소수자와 관련한 이 사태 전반이 감리회의 명예를 실추할 뿐 아니라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도록 하고,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빼앗는다는 말이었다. ‘선교에 방해된다’ ‘선교를 해친다’는 말은 기독교인에게 교회의 존재 목적을 상기시키는 민감한 표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전파해야 하는 본연의 사명을 띠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환이 교회의 존재 목적과 사명을 해치는 행동을 한다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토록 선교를 걱정하는 교계 어른들도, 동환이 담임하는 영광제일교회의 교인들이 담임목사의 목회를 받지 못한 채 수개월간 방치됐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몇 가지 범과 사항에 한해 재판기간 동안 담임목사의 직임을 정지하도록 정해놓은 교회법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재판기간이 기약 없이 늘어지며 성명과 기자회견으로 교인들의 고충을 읍소했지만, 재판위원들은 이 작은 교회 하나쯤 흩어져 사라져버리든 말든 아무 상관 하지 않았다. 과연 누가 선교에 방해됐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영광제일교회, 우리 교회 교인이 어느 날 천막농성을 제안했다. 그 교인은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었다. 사회가 나를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떻게 절망하지 않고 싸우며 삶을 위대하게 일구는지 인권운동으로 배워가는 중이었다. 어쩌면 일상을 저당 잡힌 채 재판위원회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무기력해지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극적인 저항과 떠들썩한 소란인지도 몰랐다. 천막농성, “무서워하지 말고 천막 치고 드러눕자!”고 장난처럼 주고받던 말이 점점 진지하게 다가왔다. 나는 대학원에 휴학계를 냈다.

2021년 6월21일, 서울 광화문 한복판 감리회관 빌딩 바로 앞 계단에 천막을 세웠다. 우리는 대책위를 확대해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다른 교단의 교회와 초교파 기독단체들이 함께해줬다. 이제 우리는 더 큰 우리가 됐다. 우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공정한 재판 속개와 차별 조항 폐기를 요구했다.

2021년 6월23일 천막농성장 앞에서 이동환 목사와 연대자가 손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 제공

2021년 6월23일 천막농성장 앞에서 이동환 목사와 연대자가 손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 제공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동성애에 기인하지 않았다

당시 발언 내용을 다룬 <뉴스앤조이> 기사를 살펴보면, 동환이 이렇게 말한다. 몇몇 목회자에게 “가만히 있으라” “이렇게 시끄럽게 하면 판결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조언을 들었지만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재판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귀하디귀한 벗들의 생명”이며 “하나님은 성소수자 또한 있는 모습 그대로 동일하게 사랑하신다”고.

동환이 굳이 ‘생명’까지 언급한 데는 이유가 있다. 2003년 4월25일, 동성애자인권연대 청소년 활동가로서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의 동성애 차별 조항 개정 운동을 하던 육우당씨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단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2003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청소년보호법에 있는 동성애자 차별 조항을 삭제하라고 권고하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반대 성명을 내며 성소수자 혐오를 드러냈다. “동성애로 성문화가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으로 망했다. 성경은 동성애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교계가 성소수자, 특히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드러낼 때 대표적으로 언급하는 구약성서 시대의 지역이자 사건의 이름이다.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멸망은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고 오히려 짓밟은 폭력의 결과이지 동성애에 기인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 시대 때, 그가 사는 지역에 나그네 세 사람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환대하고 극진히 대접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그네에 대한 환대는 일종의 예절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신적 명령이었다. 그 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는 소돔 지역에도 나그네 세 사람이 이른다. 롯 또한 달려나가 나그네를 극진히 환대한다. 여기까지는 아브라함과 롯이 동일하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 앞에 몰려들어, 당장 그 낯선 사람들을 내놓으라며 우리가 그들을 알아야겠다고 요구한다. 여기에서 ‘알아야겠다’는 말은 상관하겠다, 동침하겠다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이고, 그들의 요구는 이 나그네들을 끌어내 성폭행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복음과 상황> 제307호에 실린 글 ‘나그네를 짓밟는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과 롯은 자신들에게 다가온 나그네의 신원과 정체를 묻지 않고 극진히 대접하되, 소돔 사람들은 우리가 ‘알아야겠다’며 이들을 짓밟으려고 한다. 이러한 ‘앎’은 상대를 자신들의 틀로 맞추고 바꾸려는 행동의 표현일 것이다. 그들 가운데 들어온 낯선 이들은 이미 그 땅에 존재하던 이들의 사고방식과 틀에 맞아야 존재가 가능해져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짓밟을 수 있는 것은 나그네들이 자신들에 비해 소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악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 자신들을 보호할 힘이 없는 이들에 대한 짓밟음과 유린”이었지 동성애가 아니었다.

천막농성장의 단순한 일과

2000년대에도, 소수인 약자를 향해 혐오와 몰이해를 쏟아낸,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그런 일을 저지른 교회 때문에 육우당은 스스로 삶을 중단했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수많은 성소수자가 교회 안과 밖에서 지속적으로 상처받고 있다. 육우당을 추모하며 무지개예수에서 수년째 주관하는 ‘차별과 혐오에 희생된 벗들을 추모하는 기도회’를 통해 우리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싸움은, 생명을 지키려는 염원과 닿아 있었다. 미움은 삶을 갉아먹는다, 혐오가 생명을 파괴한다는 사실이 실제 내 눈앞에 있는 성소수자의 일상에 작동했다. 구석에 몰릴수록 우리는 더 비장해졌다. 우리를, 그리고 동환을 더욱더 진심이게 하는 것은 바로 “가만히 있으라”며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교계 어른들이었다.

농성장을 만들고 천막에 몸을 누이던 첫날 밤, 바로 옆 도로에서 쌩쌩 달리는 차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으면서 기막혔던 감각을 기억한다. 내가 왜 세상 사람들 눈총을 다 받아가며 이리도 바득바득 살아가는가, 악착같이 이 장소에 존재하는가, 기가 막혔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안 보이는 데로 가, 조용히 해.’ 이런 눈빛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그 마음을 모른다. 광화문의 그 밤, 내 안에서 점점 오기가 돋아나며 ‘밀어내봐라, 내가 밀어지나. 치워봐라, 내가 치워지나. 점점 더 억척스럽게 시끄럽게 존재할 거야!’ 하는 마음이 됐다. 첫날 농성장을 지키려는 많은 연대자가 천막 밖에서 우리의 싸움을 지켰다.

천막농성장에서의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이면 천막 천을 말아 올려 통풍이 원활하게 하고, 이부자리와 짐을 정돈한다. 건물 사람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감리회관 빌딩 앞에서 우리의 주장을 담은 손팻말을 들고 한 시간쯤 시위하다가, 농성장에 들어와 한숨 돌리고, 점심이 되면 찾아온 동지들과 함께 빌딩 앞과 뒤에서 또 한 시간쯤 서서 손팻말 시위를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조를 나눠 식사한다. 보통 투쟁 현장에선 농성장을 떠나지 않고 식사를 해결하지만, 우리의 경우 코로나19 방역을 신경 써야 했다. 덕분에 농성장 근처 콩국숫집과 평양냉면집을 자주 드나들었고 밥 먹는 동안은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쉴 수 있었다.

저녁이 되면 연대하는 동지들이 모이고 기도회가 열린다. 매일매일 기도회를 했다. 때마다 용기를 잃지 않으려 더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함께 웃었다. 밤 9시가 되면 하루를 정리하는 회의가 시작된다. 대책위 멤버 Y는 매일매일 회의 안건을 정리하고 회의록을 작성해 공유했다. 나는 ‘오늘은 큰 안건이 없으니 회의 건너뛰고 좀 쉽시다’라고 말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뜻을 이룬 날은 드물었다. 근면한 동환, 그리고 Y의 성실함이 지독하게 느껴졌다.

여러 가지가 불편하고 많은 것이 감사한 날들

밤이 되면 천막 천을 내려 입구를 닫고 모기장을 편다. 밤샘 농성에 연대하는 사람이 늘어나 하루걸러 하루, 또는 며칠을 연달아 집에서 잠자고 아침 일찍 나올 때도 있었다. 사방을 비닐이 아니라 벽으로 막은 곳에서 조용히 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창호가 오래돼 동네 싸우는 소리가 다 들어오는 집에 누워서도 감사했다.

코드만 연결하면 배터리를 빠르게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는 또 어떻고. 농성장에는 빈곤과 주거권 운동단체에서 빌려준 발전기가 있었지만, 기름을 써야 했기에 아껴 돌렸고 애초 발전기로 끌어오는 전기로는 충전에 한참이 걸렸다. 그날그날 집에 가서 자는 사람이 배터리나 휴대조명을 가져가 충전해야 했다. 집에서 당연하게 쓰던 전기와 상하수도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는, 여러 가지가 불편하고 많은 것이 감사한, 그런 날들이었다.

노랑조아(김은선) 믿는페미 활동가

*무지개와 십자가: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 ‘믿는페미’ 활동을 하는 노랑조아(김은선)가 배우자 이동환 목사와 함께 교회 내 성소수자 혐오, 가부장성에 맞선 이야기를 전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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