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정직으로는 최고 형량인 2년이 선고되자 우리는 곧바로 항소했다(감리회 재판은 2심제로, 연회재판에서 불복하면 항소해 총회재판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재판비용이었다. 감리회의 재판에는 기탁금제도가 있다. 재판을 시작할 때 고발인이 기탁금을 내고, 승소하면 피고발인이 이 비용을 부담하도록 한다. 최대 비용은 700만원인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재판위원의 인건비와 식비, 교통비와 주차비 등으로 쓰인다.
이동환 목사를 고발한 경기연회 심사위원회는 기탁금을 내지 않고도 재판이 진행됐지만, 유죄판결을 받은 우리는 그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1심 재판비용 700만원과 항소 기탁금 700만원, 모두 합해 1400만원이 마치 벌금처럼 동환 앞으로 청구됐다. 목회자에게 급여를 주지 못하는 작은 교회 담임자로서, 동환에게 그런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는 수 없이 모금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본격적으로 홍보하지도 않았는데 기사로 재판 결과를 알게 된 사람들이 대책위(성소수자 축복기도로 재판받는 이동환 목사 대책위원회) 계좌로 후원금을 보냈다. 목사님이 어째서 이런 고초를 당해야 하느냐고 울분을 토하며 송금한 동지도 있었고, ‘당신이 축복한 성소수자’라고 내용을 남기며 송금한 이도 있었다. 5천원, 1만원, 2만원, 10만원씩 후원금이 들어왔다. 동지들이 땀 흘려 번 돈을 모아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교단 어른들의 호주머니로 넣어야 한다는 게 억울하고 죄스러울 뿐이었다.
대책위 분위기가 전환됐다. 본래 교단 재판이라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연대하려고 모인 사람들이기에 대책위 구성원은 다양했다. 나이로 치자면 1993년 대학에 입학한 이도 있었고 그해에 태어난 사람도 있었다. 최근 몇 년간 교계의 성소수자 차별에 예민하게 반응한 이도 있었고,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뛰어들어 엄혹한 시절을 버텨온 이도 있었다. 운동권의 위계적인 질서와 문화가 크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세대도 있었고, 평등한 관계와 민주적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대도 있었다. 동환이 목사로서 받는 고초를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는 책임감에 골몰하는 사람, 이 사태를 계기로 더 본격적으로 성소수자 운동을 해나가야 하는데 재판 추이를 지켜보며 발언 수위를 조절해야 해서 답답해하는 사람이 모두 존재했다.
서로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뜻으로 모였다고 해서 한마음이 되는 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는 현장에서 흔히 있기 마련인 오해와 소통의 엇갈림, 성소수자 차별 문제를 둘러싼 온도 차이와 각자 일하는 방식이 달라서 생기는 어려움 등이 우리의 다양성만큼이나 얼기설기 얽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느끼는 교계 권력의 폭력성과 야만성이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쉽게 상처받게 했다. 이른바 ‘성소수자 차별법’(교리와 장정 제3조 8항, 동성애를 도박·마약과 같은 범과로 여김)으로 고발된 재판은,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그만큼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잘못된 선례를 만들어서도 안 됐고, 이 싸움에 연루됐다고 느낄 크리스천 성소수자와 앨라이(차별에 반대하는 연대인)에게 상처를 안겨서도 안 됐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를 예민하게 했다.
1심 연회재판 결과가 2년 정직이라는 중형으로 내려진 이상 이제는 우리 색깔을 명확히 드러내야 했다. 우리는 “축복은 죄가 아니다”라고 외치던 손팻말을 내려놓고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성소수자 차별 조항 폐기하고 성소수자 환대 목회에 앞장서라!”고 외쳤다. 손팻말에 무지개 모양을 넣었으며, 동환은 전과 같이 소신을 밝히며 인터뷰에 응했다.
2030세대 청년들은 자체적으로 조직을 만들어 ‘할렐루야 퀴어’라고 이름 붙이고, 1심 선고공판에서 느낀 분노와 모욕감을 상기하며 매일 정오에 서울 광화문 감리회관 빌딩 앞에서 한 시간 동안 손팻말 시위를 했다. 5060세대 선배들 또한 사안의 심각성에 동감하며 조직을 꾸렸다. 감리회 ‘성소수자 차별법’의 문제점을 다루고, 아예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기 위한 기독인 세미나까지 열었다. 차후 감리교 내에서 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 그룹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감리회의 법을 제·개정하는 입법의회에는 총회 대표들만 들어갈 수 있고(일종의 대의원 역할), 이 총회 대표의 자격은 압도적으로 ‘어른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차별너머’라고 그룹 이름을 짓고 세미나 프로그램, 기독인 인터뷰 영상 배포, 성명 발표 등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대책위는 기도회팀을 꾸려 광화문 감리회관 앞에서 현장 기도회를 시작했다. 항소심을 감당하려면 더 많은 사람과 함께해야 하고,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힘내야 했다. 왜 교회가 일요일마다 모이려 하는지, 왜 수많은 투쟁 현장이 매일 집회를 열고 자꾸만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만드는지 알 것 같았다. 사안에 집중하고 싸울 힘을 내려면, 물길을 거슬러 오르듯 일부러 꾸역꾸역 모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연스레 마음이 스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기도회팀장을 맡았다. 팀원들이 매주 웹자보를 만들고 순서지를 만들고 음향과 악기를 나눠 맡았다. 그동안 연대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기회가 없어 멀리서 응원하던 분들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연대 성명에서 이름만 본 분들을 직접 얼굴 보고 만나 인사를 나누니 대책위에도, 또 동환에게도 힘이 됐다.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찬양과 같이 읽는 기도의 말들, 눈빛으로 전하는 우정이 참으로 귀했다.
하지만 때는 2020년 겨울, 코로나19 유행이 심해지고 있었다. 방역수칙이 강화돼 야외 집회에서도 일정 인원 이상이 모일 수 없었다. 우리는 기도회를 온라인으로 바꿨다. 기도회 순서자만 광화문으로 모이고, 연대자는 유튜브 중계로 참여해달라고 했다. 퍽 기운이 빠졌지만 우리는 그치지 않고 기도회를 이어갔다. 날이 점점 추워져 눈이 펑펑 내리는 와중에 기도회를 진행한 날도 있었다. 핫팩을 나누고 서로의 안전을 걱정하면서, 우리는 참 애틋했다.
감리회 교리와 장정에 따르면 재판은 2개월 안에 판결하게 돼 있다. 항소심인 상황을 고려하면 더 빨리 끝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1심 판결이 10월15일이었으니 대책위가 예상한 현장 기도회 일정은 기껏해야 12월까지였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재판 일정이 무기한 늘어졌다. 겨울이 다 가고 따뜻한 봄이 지나 더운 여름이 될 때까지, 재판은 엉망으로 늘어졌다. 우리는 기약 없는 기도회를 계속 이어갔다.
항소심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났다. 1심 연회재판에 비해 2심 총회재판은 더 상식적이고 체계적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항소심은 원심이 그리울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처음에는 재판부에서 코로나19 방역 때문이라며, 당사자와 변호인 1명만 출석하라고 통보했다. 우리 변호인단은 교리와 장정에 근거해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를 요구했지만, 재판부는 이 재판이 예민한 사안이라며 거부했다. 2심 재판날 오전 같은 장소에서 30명 규모의 반동성애 행사가 치러졌다. 우리는 재판부의 태도가 이중적·권위적이라 비판하고, 재판부 전원 기피 신청을 했다. 공개재판의 원칙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기자의 출입을 허락하거나 방청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우리 생각이었다.
그 뒤 새롭게 배정된 재판부에서 공판을 열어 참석했는데, 개정하기 전에 재판위원장이 동환을 고발한 경기연회 자격심사위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를테면 경찰 역할을 맡았던 이가, 자신이 수사하고 검찰에 넘긴 사람을 판결하려고 판사석에 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교묘하게 숨긴 채 자신이 동환과 같은 연회 소속이므로 재판위원 자격에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당사자들이 양해한다면 이대로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가 자격심사위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 변호인단이 이의를 제기하자, 그는 아쉬워하며 재판위원 역할을 회피했다. 재판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다음 공판기일이 언제 잡힐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동환과 나는 엄청난 근심을 품은 채 일상을 버텨내고 있었다. 공판 전날 제대로 잠잘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당일에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악의에 찬 집회와 피케팅을 헤쳐가며 재판정에 들어가야 했다. 적대감과 적개심을 대면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었다. 또 당사자뿐 아니라 변호인단, 대책위와 연대자들이 생업을 제쳐두고 광화문으로 모이는데, 때마다 비상식적 이유로 재판이 진행되지 않자 재판부가 우리를 농락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추후에는 이렇게 재판부의 실책으로 성사되지 않은 재판의 비용까지 모두 대책위에 청구했다.
또 하나, 재판을 진행하며 가장 힘든 부분이 뭐였냐고 물으면, 동환은 수많은 전화라고 답한다. 같이 밥 먹다가 전화를 받으면 동환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전화를 들고 낑낑댔다. 가깝게 지내는 선후배나 은사님, 오랜만에 연락한 동기나 친구가 응원하는 마음을 전하려는 전화였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들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훈수를 두느라 그를 오래 붙잡았다. 성소수자 차별 이슈에 무지하거나 심지어 그에게 반대하는 크리스천이 전화해 항의할 때는 동환이 사명감을 가지고 상대를 설득했다. 낮에도 한밤중에도, 그의 목회자와 운동가 자아가 계속 작동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노랑조아(김은선) 믿는페미 활동가
*무지개와 십자가: 크리스천 페미니즘 운동 ‘믿는페미’ 활동을 하는 노랑조아(김은선)가 배우자 이동환 목사와 함께 교회 내 성소수자 혐오, 가부장성에 맞선 이야기를 전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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