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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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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고 진짜 다 망한 것이 아니다

오이디푸스가 나아간 무의미의 공간, ‘무의미’에는 ‘망함’과 ‘탄생’이라는 양가적 이야기가 다 들어 있어
등록 2022-10-19 08:02 수정 2022-10-20 23:27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광야로 나간다. 광야는 감각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공간이다. 2019년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 황정민이 연기하고 있다. 샘컴퍼니 제공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광야로 나간다. 광야는 감각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공간이다. 2019년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주인공을 맡은 배우 황정민이 연기하고 있다. 샘컴퍼니 제공

“깜짝 놀랐어요. 다들 ‘무의미’라는 말에 공감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더라고요. 무의미에 대한 공감이 우리 세대의 특징인 것 같아요.”

그리스 고전 비극인 오이디푸스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공연의 연출을 준비하는 학생이 배우들과 작품 분석을 하며 나온 이야기라며 들려줬다. 연극 마지막에 오이디푸스가 세상을 뜨는 광야를 무엇으로 해석할지를 두고 토론하는데 수업 시간에 배운 ‘무의미’의 공간과 그 무의미를 견디는 감각의 주체가 된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했더니 갑자기 배우(학생)들도 “그게 뭔지 알 것 같다”며 자기 경험을 보태면서 활력이 넘쳤다고 한다.

‘삶의 무의미’가 세대의 공통 감각?

삶이 무의미하고 덧없다고? 이건 보통 인생의 고된 짐을 지고 산전수전 다 겪은 뒤 회한에 차 인생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아닌가. ‘젊디젊은’ 청년이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다고 하면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타박을 듣기 쉽다. 이 말을 하는 학생들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삶의 무의미가 자기 세대의 삶에 대한 공통 감각인 것 같다고 말한다.

이들의 말에서 내 귀가 번쩍 뜨인 것은 ‘감각’이라는 단어다. 이들은 의미를 상실했다고만 하지 않고 ‘무의미를 감각했다’고 말한다. 이 둘은 천지 차이다. ‘세대론’에 매우 비판적인 사람으로서도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었다. 무의미를 감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감각한다’는 말은 무의미가 ‘읽을 게 없음’이라는 통상적 뜻과는 달리 ‘읽는 힘’으로서 ‘행위능력’을 말하는 것 아닌가. 이 힘으로 작품을 읽으면 어떻게 다르게 읽히고 또 주인공은 어떤 다른 인물이 되는가.

먼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답부터 나왔다. 무엇보다 지금 하는 일에 미래가 있는가. 아주 밝은 미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현재는 자기에게 무엇보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을 계속하며 살아갔으면 하는데, 그러한 미래마저 보이지 않는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면 현재는 무의미하지 않은가 하는 회의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는 곳이 서울의 바깥, 즉 ‘시골’이다. 오이디푸스가 떠나는 광야와 이 ‘시골’이 겹쳐 보인다는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첫째로 도시(여기서는 명백히 서울을 의미한다)의 바깥은 무의미 이전에 젊은 학생들에게 ‘버림받은 공간’으로 여겨진다. ‘버림받은 땅’이라는 느낌과 함께한 학생은 하루하루 의도하지 않게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이 시골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가?’

‘서울 아님=시골=버림받은 곳’이라는 생각은 학생들에게 하루하루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들마저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버림받은 곳에서 무의미의 공간으로 직행한다. 너무 좋아서,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여기면서도 동시에 내가 있는 공간이 어디인지를 생각하면 바로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는 직업과 미래의 불안정성만큼이나 공간의 위치, 그 자체에서 오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현재’도 잡아먹는다.

“우리 학교가 참 이쁘잖아요. 교문에서 자취하는 방까지 오는 길이 참 이쁘잖아요. 그런데 그 길을 감상하면서 감탄하며 내려오다가도 불쑥 생각이 들어요.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는 덧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 전문대니까 그렇지, 뭘”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명실상부 한국에서 최고라고 자부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 전공의 학생 중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이가 많다. “지금이야 잘나가죠. 돈 많이 벌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어요?” 이미 작가로 활동하며 꽤 많은 돈을 버는 만화스쿨 학생의 이야기다.

‘우연’조차 ‘필연’으로 이해하고 배치하는 것

도시의 바깥, 광야는 버림받은 자들의 공간이다. 이들이 공연을 준비하는 오이디푸스에서도 그렇다. 자식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을 도시 바깥에 데리고 나가 죽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시대에 아버지는 아들을 합법적으로 버리거나 죽일 수 있었다. 생살여탈권이 아버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것처럼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록 몰라서 벌어진 우연이더라도 도시 바깥의 공간이어야 했다. 그곳은 무법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삶에 법이라는 형식이 부여되지 않고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점에서 무법의 공간은 버림받은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학생들에게 서울 바깥은 사실상 ‘버림받은 공간’이다.

오이디푸스는 도시의 바깥을 세 번 경험한다. 한 번은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곳으로, 다른 한 번은 아버지를 죽이는 무법의 공간으로, 그리고 마지막은 스스로 눈을 찌르고 걸어나가는 공간으로. 이 마지막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오이디푸스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된다. 운명에 패하고 신의 저주를 받은 추방의 공간인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운명에 맞서는 공간인가. 아니면 이 둘을 넘어 이들의 경험에 맞는 다른 공간으로 동시대화할 수 있는가.

만일 광야가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그는 왜 죽지 않고 광야로 나가는가. 만일 죽지 못하는 것이 생에 대한 집착이라면 생에 집착하는 자가 왜 눈을 찌르는가. 이 모순된 행동을 모순되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모순 안에서 일관성을 찾아야지만 ‘인물’이 완성되고 배우가 그 인물을 살아 있게 연기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사랑 예찬>에서 쓴 개념을 빌리면 ‘우연’조차 ‘필연’으로 이해하고 배치해야 하는 것이 이야기의 세계다. 그래야 주인공이 우연이라는 사건 ‘이후’를 충실히 살아가는 자, 주인공이 된다.

이 과정에서 나온 말이 ‘무의미’였다. 오이디푸스는 현명함으로 행방불명된 전왕의 아내와 결혼하고 왕이 됐다. 그의 통치는 역병이 돌기 전까지 나무랄 틈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다른 말로 하면 질서가 잡혔고 잘 작동했다. 언어의 질서가 잘 잡히고 작동해야지만 의미가 발생하고 소통된다. 오이디푸스는 무질서를 수습하고 언어의 힘으로 질서를 다시 회복한 의미의 수호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혼돈, 무의미 위에 세워졌다. 자기가 결혼한 전왕의 아내는 자신의 어머니였고 자기가 죽인 사람은 아버지였다. 역병이 돌면서 그동안 더할 나위 없는 성군으로 칭송받던 그는, 그의 죄로 인해 도시에 재앙을 가져온 범인으로 지목된다. 가장 고귀한 ‘왕’에서 가장 불온하고 불결해 처단해야 하는 ‘희생양’으로. 오이디푸스에 대한 많은 해석 중 하나다.

일찍 ‘허무주의자’가 된 사람들의 세 가지 길

학생들은 오이디푸스에 대해 자신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것이 분명해 보일지라도 ‘진실을 알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자라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자신하고 오만했다는 이성의 질서, 즉 기존 질서 위에 기초한 의미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하게 무의미/혼돈 위에 세워졌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아니겠냐는 말이 나왔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보는 것=질서’를 추구하는 시각을 스스로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광야로 나아간다. 학생들은 오이디푸스가 나아가는 광야를, 보이는 것을 질서로 확신하던 ‘무지’로 인해 감각하지 못했던 것을 감각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공간으로 연출하고 싶다고 했다.

‘무의미’라는 말에는 ‘망함’과 ‘탄생’이라는 양가적 이야기가 숨어 있다. 하나는 허무주의적 태도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결국 모든 것이 망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허무주의적 감수성. 그래서 이들은 ‘망했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조금만 뭐가 어긋나도 바로 ‘망했다’는 말이 나왔다. 이들은 너무 ‘일찍’ 허무주의자가 됐다. 이 허무주의자들은 “이런 세상 망해버려라”며 세상을 적대하고 타인의 멸망을 가장 통쾌해하는 과격주의자가 되거나, 다른 한편에선 의미로 충만해 보이는 것의 이면, 생의 무의미를 직시하는 실존주의자가 됐다.

그러나 “망했어요”라며 세상이 허무하고 현재 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이들의 말은 동시대에 대한 감각이자 무지에 대한 자각의 말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른 것을 시각 상실이 아니라 ‘시각으로 인해 눈이 멀어’(이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인가? 시각으로 눈이 먼다는 것 말이다.) 감각하지 못하는 것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읽었다. 이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 자가 아니라 이 시대의 (망할 수밖에 없는) 의미를 무의미로 감각하는 자이기도 하다. 망한 것을 망한 것으로 감각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자보다 망한 것을 망한 것으로 감각할 수 있는 자가 다음 시대로 ‘탈출’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독법대로라면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언제 누가 어떻게 제물이 될지도 모르는 희생제의로 가득한 도시에서의 ‘탈출’이라는 새로운 선택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테베에 남아 언제 내 차례로 돌아올지 모르는 희생제물이 될 것인가, 아니면 테베 시민들에게 버림받아 쫓겨날 것인가. 그러나 사실 이 둘은 모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두 가지인 것처럼 보이는 이 선택이 죽음에 대한 강요일 뿐임을 깨닫는다. 죽음의 강요 앞에서 그는 차라리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것, 즉 죽음을 대면하며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 중에 유일한 것은 자신의 죽음 양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정한 이후에 비로소 “삶을 위한 싸움을 결정”한 것 아닌가?

오이디푸스야 그랬거나 말거나 지금 청년들의 ‘선택’이 그러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무의미를 삶에 대한 포기가 아니라 삶에 드리워진 시대의 암흑을 ‘읽는 힘’으로 강하게 전유하고 추동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지 않을까? “인생에 대해 뭘 안다고, 애늙은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타박할 것이 아니라 (몇 번이나 이 지면에서 말한 것처럼) 시대의 암흑을 ‘빛의 상실’이 아니라 암흑으로 감각하고 대면하는 자가 바로 동시대인이니까 말이다.

지금 청년들에게도 강요가 아닌 선택이 있는가

주인공이란 언제나 남들이 감각하지 못한 것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다. 답으로 주어진 선택의 무의미를 감각하고 죽음 양식을 ‘선택’하는 것으로 주인공의 행동을 읽어내는 힘이 있다면 “삶을 위한 싸움”도 감행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에 속지 않고 그 이야기를 이기기 위해 우리 이야기를 함께 읽고 또 읽으며 ‘우리’의 행위능력을 고양하고 전유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가 표면적으로 제시하는 선택을 넘어 주인공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때 마침내 이야기를 넘어 삶에서 “삶을 위한 싸움”을 써내려갈 수 있다. 그때까지 함께 ‘오직 읽을 뿐’.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 글에 등장하는 ‘행위능력’ ‘죽음 양식’ ‘삶을 위한 싸움’ 등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 실린 압둘 잔모하메드의 글 ‘말하기와 죽기 사이에서’에서 가져온 말이다.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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