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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훔친 12마디

등록 2022-09-15 06:22 수정 2022-09-15 22:31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얼마 전 뮤지컬처럼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가 음악처럼 들리는 꿈을 꿨다. 그곳에서 나는 클럽과 교실, 길거리, 콘서트장을 맥락 없이 이동하며 멜로디를 즐겼다. 너무 아름다워서 꿈속에서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깨어나자마자 내가 했던 일은 녹음 앱을 켜고 꿈속에서 들었던 멜로디를 다시 흥얼거려 녹음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꿈으로부터 12마디의 멜로디를 훔쳐오는 데 성공했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내 귀에는 꽤 쓸 만한 멜로디로 들렸다.

상상 이미지를 몸 밖의 화면에 비춘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것만 체험할 수 있다면 꿈은 최고의 예술형식이 아닐까 하는 판단이 든다. 만약 꿈에 대한 기록과 재현이 가능하다면 예술가의 몸으로 출력돼 나오는 고통과 오류를 덜고 영감의 원형 그대로 관객에게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면의 눈으로 본 이미지를 밖으로 상영하려는 노력은 한 발명가가 이미 진지하게 전개한 적이 있다.

교류전기의 발명가로 알려진 니콜라 테슬라는 자신이 본 이미지를 밖으로 출력할 수 있는 기술에 평생 집착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섬광같이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주 봤는데, 이 경험을 병으로 생각하지 않고 눈이나 뇌가 매우 흥분해서 반사작용으로 이미지가 나타난다고 가설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깨어나면 사라지는 꿈의 이미지와 달리 테슬라는 일상 속에서 종종 이러한 환각을 경험했다. 이렇게 한번 각인된 이미지는 다른 시각 자극으로 대체해야만 사라졌다.

테슬라는 대체 이미지를 생생하게 상상하는 법을 연마했다. 한번 이미지를 구상하면 그대로 베끼기만 해도 물건이나 기계를 설계할 정도의 해상도였다. 이 경험에 의거해 그는 인식하는 모든 사물은 그 이미지를 몸 밖의 화면으로 비쳐 보일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 기술이 커뮤니케이션 혁신을 가져와 인간의 모든 관계를 변화시킬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그가 살던 당대의 기술력으로는 기초조차 세울 수 없었다. 테슬라의 몽상이었다.

최근 네덜란드 라드바우드대학의 연구팀은 시력을 담당하는 뇌 영역의 뉴런 활동을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로 스캔하고, 스캔 정보를 인공지능(AI) 알고리즘에 넣으면 본래의 자극 이미지와 비슷한 이미지를 출력하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특정 이미지의 자극과 뉴런의 반응 간 상관관계를 AI가 학습해 이미지를 인공지능이 예측해주는 방식이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은 범인의 몽타주에 확신을 부여하는 일이나 거동불편자의 마음을 간단히 읽는 일에 활용될 예정이지만 인간 내면의 이미지를 밖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시도로서 의미가 있다. 테슬라의 몽상은 fMRI와 AI 기술의 결합으로 실현되는 중이다.

각자의 꿈을 엿보는 시대

이 기술이 더 개발돼 해상도가 높아진다면 영감으로 가득 찬 꿈을 직업적으로 꾸는 자가 꿈을 밖으로 상영하거나 3차원 공간으로 변형해서 관객이 그 꿈을 관람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른바 ‘꿈 예술가’의 탄생이다. 모두가 그날 꾼 꿈의 이미지를 SNS에 올리며 각자의 꿈을 엿보는 시대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꿈 예술가는 세상에 없는 멜로디와 이미지 패턴을 직조하는 자로서 오로지 그 영감만을 탈취당하는 생체적인 AI로 전락할 수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도 든다.

최초의 프로그래밍으로 간주되는 자카르 직조기(1801년)는 당대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는 인간 장인의 노동을 천공카드로 프로그래밍해 훔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간 노동에 대한 탈취는 프로그램의 원죄인 것이다.

꿈 예술가는 자기 무의식마저 새롭게 착취할 대상으로 삼거나 그 자신이 착취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망상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는 꿈 예술가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을 멈추게 됐다. 당장 꿈으로부터 훔쳐온 멜로디 12마디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영진 테크노컬처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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