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블랙아웃인 경우 인지기능이나 의식이 정상이며 단순히 기억만 못하는 상태로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 준강간, 준강제추행 성립이 부정된다.
의식상실은 아니지만 행위통제능력이 결여된 경우 피해자가 의식상실 상태는 아니지만 알코올의 영향으로 심리적 또는 물리적으로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경우라고 보면 준강간, 준강제추행 성립이 가능할 수 있다.
행위통제능력이 미약한 경우 의식장애는 인정될 수 있지만 의사결정능력(성적 자기결정권 행사와 연관)이 약화됐을 뿐인 경우는 ‘항거곤란’ 등 새로운 요건이 없는 한 준강간, 준강제추행 성립이 어렵다.
패싱아웃인 경우 술에 취해 수면 상태에 빠지는 등 의식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로, 전형적인 심신상실로 준강간, 준강제추행이 성립된다.
(‘형사재판에서 블랙아웃 현상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 산학협력단, 2020년 1월)
“제가 사건 당시의 기억이 불완전하지만 (기억이) 조금은 있다고 준강간이 아니래요.”
클럽에서 처음 만난 30대 남성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한 뒤 고소한 피해자의 말이다. 피해자는 친구들과 클럽에 놀러 가 평소 주량을 넘긴 상태에서 처음 보는 가해 남성과 인사했고, 이후 친구들이 도중에 사라진 피해자를 다시 찾았을 때는 낯선 모텔이었다. 성폭력 피해를 인지한 피해자는 친구들의 권유로 경찰을 찾아갔고 경찰은 이 사건을 준강간으로 규정해 검찰에 송치했으나 검찰에서는 ‘(알코올) 블랙아웃’(‘술 먹고 필름 끊김’)으로 볼 수 있어 준강간죄 요건에 맞지 않는다며 보완수사를 요구했다.
형법 제299조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 또는 추행을 하면 강간 또는 강제추행의 죄와 같이 처벌하도록 규정하는데 이를 준강간, 준강제추행이라고 한다. 깊은 수면, 술이나 약물 등을 복용해 의식을 상실하거나 정상적인 판단능력, 대응능력 행사가 어려운 상태에서 당한 성폭력 피해에 적용한다. 이때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였는지, 그리고 가해자가 그 상태를 이용해 성폭력을 저질렀는지 등이 핵심이다.
그러다보니 가해자들은 사건 당시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다거나, 설령 피해자가 기억하지 못했더라도 그것은 일시적 기억상실인 ‘(알코올) 블랙아웃’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실제 하급심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하는 일이 늘어났다. 다시 말해 의식상실로 평가받는 ‘패싱아웃’이 아닌 이상 ‘블랙아웃’으로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준강간 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163개 단체)’에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의뢰해 2019년 1~12월 지원한 준강간 사례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로 보기 어렵거나 블랙아웃이 인정돼 불기소, 무죄판결이 내려진 비율이 전체의 40%를 넘었다.
문제는 성범죄 사건에서 ‘(알코올) 블랙아웃’이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다른 잣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과거에 견줘 음주 감경을 주장하는 성범죄 가해자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는 블랙아웃을 내세워 심신미약 감경을 노린다. 2019년 한 대학 기숙사에 침입해 성범죄를 저질렀던 20대 남성은 블랙아웃을 내세워 1차 감경(법률상 감경: 심신미약)됐고, 이어 2차 감경(정상참작 감경)까지 받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준강간, 준강제추행 피해자가 블랙아웃을 주장할 경우 수사기관과 법원은 오히려 이를 피해자에게 불리한 단순 블랙아웃으로 판단해 불기소처분이나 무죄선고를 내렸다.
그러다보니 준강간, 준강제추행으로 신고·고소한 피해자는 큰 부담을 안게 된다.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을 좁게 해석하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진술이 상세하면 항거불능임을 인정받지 못하고(이렇게 상세히 진술할 정도면 당시 왜 거부 의사 표명이나 적극적 저항을 하지 않았느냐), 진술이 부족하면 단순 블랙아웃(당시 성관계 동의를 했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오인할 만한 상황이 있었다는 등)으로 의심받으며, 아예 기억하지 못할 경우 가해자 진술(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피해자의 상태, 당시 상황을 편집하는 형태 등)에 대응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아가면서 피해는 입었지만 구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법원이 용역 의뢰한 ‘형사재판에서 블랙아웃 현상에 관한 연구’ 보고서가 나왔다. 보고서에서는 블랙아웃을 ‘단순 블랙아웃’과 ‘패싱아웃’ 외에 인지장애, 의식장애 여부 등과 연결해 분류한 뒤 행위결정능력의 결여와 약화까지 따져 준강간·준강제추행의 성립 여부에 더 세심하게 접근하고, 피해자가 블랙아웃을 주장할 경우 심리학자 등 전문가의 판단을 참고하도록 권유했다. 즉 단순 블랙아웃의 경우 인지능력이나 의식이 정상인 상태에서 사후 기억 형성에 일시적 장애만 있는 것이라 준강간·준강제추행을 적용할 수 없고, 패싱아웃은 의식상실(전형적인 심신상실)이라 준강간·준강제추행 적용에 이견이 없지만, 중간 단계의 블랙아웃은 행위결정능력이 결여되거나 미약할 수 있으므로 이때는 상황에 따라 준강간·준강제추행 적용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가 나온 뒤 2021년 대법원은 ‘심신상실’의 대표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패싱아웃 외에 항거불능을 판단할 때 블랙아웃 상태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는 기존 판결 흐름에 제동을 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판결은 단순 블랙아웃으로 보이는 피해자의 단편적인 모습을 과대평가하고, 그 외 피해 사실 전후의 객관적인 정황이나 단순 블랙아웃으로 볼 수 없는 다른 피해자의 모습 등을 과소평가해 단순 블랙아웃으로 판단하려 했다.
물론 현실에선 변화가 더디다. 관련 보고서와 대법원 판례를 들이밀어도 수사 과정부터 기계적으로 패싱아웃이 아닌 이상 준강간·준강제추행 인정이 어렵다는 식으로 나오는 사례가 줄을 잇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대 과정에서 변호사나 수사관과 논의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요건을 충족하기 어려운 사건(피해자의 기억이 일부 존재하거나 미약하나마 저항했을 경우)은 아예 강간, 강제추행, 위력에 의한 성폭력 등으로 돌려 좀더 유연한 법원의 판단을 유도하거나 방법을 강구한다.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동의’를 요건으로 하는 강간죄 개정이나 항거불능에 ‘항거곤란’을 포함하는 등 입법적인 보완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저는 지극히 평범한 시민이며, 또 보통의 피해자입니다. 이런 저에게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많은 단체들이 함께해주는 것은 단순히 제가 운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제 사건이 가해자 같은 남성들의 잘못된 문화를 보여주는, 가장 흔히 일어나는 사건의 대표성을 띠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와 같은 피해자가 더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섭지만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2020년 7월7일 ‘준강간 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맨 앞에서 언급한 준강간 사건 피해자의 입장문이다. 2020년 5월 사건을 넘겨받은 대법원은 2년3개월이 넘는 기간에 아직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가장 보통의 준강간 사건’이라고 명명된 이 사건에 대해 한국 사법부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에 대해 폭넓게 해석하고, 피해자의 상황과 상태를 충분히 고려해 성적 행위의 ‘동의 여부’를 기반으로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란다. 2017년 이후 멈췄다는 그의 시간이 이제 미래를 향해 흐를 수 있게, 한국 사법부가 한국 사회의 ‘보통’ 수준을 올려주기를 기다리겠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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