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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아닌 집’의 절규

등록 2022-04-17 23:55 수정 2022-04-18 11:34
2022년 4월11일 화재가 난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에 유리창이 깨지고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2022년 4월11일 화재가 난 서울 영등포구 고시원에 유리창이 깨지고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집이 없어 생긴 죽음 앞에 치유도 반성도 없었다.(2019년 11월9일)

수많은 집이 아닌 거처들이, 그럼에도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강제할 정책이 필요하다.(2020년 11월9일)

집 없는 이들이 머무르는 곳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2021년 11월8일)

2018년 11월9일,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친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참사 이후 매년 나오는 추모 성명이다. ‘집 아닌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주거권을 보장하라는 절규는 국일고시원 사고 이전부터 그리고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지만, 또 고시원에서 살던 이들이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사회의 방치와 외면 속에.

2022년 4월11일 아침 6시30분께, 서울 영등포구 ㄱ고시원에서 불이 나 이아무개(75)씨와 김아무개(64)씨가 숨졌다. 이들은 각각 방 옆 복도와 휴게실에서 연기를 흡입해 쓰러져 화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다. ㄱ고시원의 월 입실료는 20만원대로 일용직 노동자나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등 주로 저소득 고령층이 머문 것으로 파악됐다.

고시원 화재로 인명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지적되는 원인이 또 반복됐다. ㄱ고시원의 바닥 면적은 191.04㎡(58평), 방은 33개였다. 화장실, 주방, 복도 등을 제외하면 3.3㎡ 정도 되는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다. 일부 방엔 창문이 없었고, 창문이 있더라도 크기가 작아 화재 발생시 유독가스가 충분히 빠져나가거나 사람이 탈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2018년 국일고시원 화재 이후 서울시는 고시원 방 전용면적을 7㎡ 이상, 방마다 창문도 의무적으로 두도록 건축조례를 개정했지만, ㄱ고시원은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2022년 7월1일 이후 신축·증축·리모델링을 하는 고시원에만 해당하기 때문이다.

간이 스프링클러도 희생을 막진 못했다. 서울시와 소방당국은 ㄱ고시원 화재 당시 간이 스프링클러가 약 10분 동안 정상 작동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간이 스프링클러라는 최소한의 장치로는 ‘제2의 국일고시원 참사’ 원인을 없애지 못한다는 뜻이다. 국일고시원 화재 이후 소방시설법과 다중이용업소법이 개정돼 모든 고시원이 2022년 6월30일까지 간이 스프링클러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더라도, 화재로 인한 인명 피해를 막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집이 아닌 집’에서 사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선 근본적으로 주거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법·제도의 변화 속도는 주거취약계층의 희생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국토교통부가 노후 고시원을 사들여 1만 가구를 공급하는 ‘고시원 매입형 공공리모델링 사업’ 대상은 ‘청년 및 대학생 1인 가구’뿐이다. ㄱ고시원에 거주하던 이들은 애초 대상이 아닌 셈이다. 서울시는 ‘노후 건물 매입 리모델링형 사회주택’ 사업의 2022년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1999년 영국 글래스고에선 학생용 공유주택에서 불이 나 대학생 2명이 숨졌다. 화재 당시 건물 내 화재감지기가 작동하지 않았고, 창문마다 쇠창살이 설치돼 대피를 막았다. 이후 영국은 5명 이상 거주 시설의 경우, 안전설비 등 주거 기준을 통과해야만 면허증을 발급하는 임대등록제를 전면 의무화했다. 사고 이후 발 빠르게 대처한 것이다.

한국의 고시원은 안전시설과 건축물 용도만 적합하면 개설할 수 있는 자유신고업종이다. 주거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손쉽게 개설할 수 있는 ‘안전하지 않은’ 고시원은 2010년 전국 8273개에서 2021년 1만1734개로 늘었다(소방청 ‘예방소방행정 통계자료’).

장수경 <한겨레> 기자 flying710@hani.co.kr

*뉴노멀: 이주의 주요 뉴스 맥락을 주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코너로 김규남 기자, <한겨레> 이승준, 장수경 기자가 돌아가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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