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국가 책임을 강화하자고 이야기‘는’ 한다. 양육·돌봄과 관련한 주요 대선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말이다. 아이를 낳을 경우 전체 육아휴직 기간을 늘리고, 특히 아빠의 육아휴직을 독려하는 것도 여야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대표 공약으로 꼽는다. 적어도 ‘저출생’이 국가적 위기이고 지금보다 돌봄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에는 이견이 없는 셈이다.
언제나처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가사노동, 돌봄, 양육의 평등한 분담은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와 노동시장, 성별 고정관념 등을 문제로 인지하고 이를 함께 개선해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개선되기 어렵다. ‘남성은 생계부양자, 여성은 돌봄전담자’라는 믿음이 굳건한 상황에서 육아휴직 기간을 아무리 늘린들 특정 성별이 돌봄과 생계부양을 이중으로 맡는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 성별 임금격차와 채용 성차별, 경력단절 등 노동시장 안에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을 개선하지 않는 한 최근 20대 여성을 중심으로 늘어나는 ‘비혼·비출산’ 의지가 쉬이 꺾일 리도 없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이러한 구조적 차별을 전면 부인한다. 윤 후보는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후보의 이러한 가치관은 공약에도 깔려 있다. 돌봄·양육과 관련한 그의 공약은 주로 돈을 더 지급하거나 국가의 양육 책임을 천명하는 데 그친다. 예컨대 가정양육수당(만 0~2살)을 월 30만원으로 인상하고 만 5살까지 전면무상보육을 지원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아이를 돌봐주는 ‘엄마품 온종일 돌봄교실’을 학교당 1개 이상 설치하는 식이다. 육아휴직 기간도 1년6개월까지 확대해 부모가 합쳐서 총 3년을 쓸 수 있도록 한다는 공약도 담았다.
하지만 여성이 출산·육아를 거치며 노동시장 밖으로 튕겨나가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주로 여성으로만 채워진 돌봄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려는 등의 공약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윤 후보는 “매뉴얼을 통해 아이돌보미의 질적 수준을 표준화”하겠다고 했다. 아이돌보미서비스를 위해 그동안 집행된 예산은 대부분 여성가족부에서 나왔다. 윤 후보가 단 한 줄로 “폐지하겠다”고 했던 바로 그 여성가족부의 예산이다. 윤 후보는 노동시장 안의 차별 문제와 관련한 공약은 없이, 가임기 여성에 대한 난임치료비 지원, 출산 뒤 산후조리비 지원 등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약만 내놨다.
눈에 띄는 정의당의 돌봄자 수당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기본 방향은 비슷하되 공약 내용만 일부 차이를 보인다. 이 후보는 초등학교 오후 3시 동시 하교제를 실시하고 초등돌봄교실 운영 시간을 저녁 7시까지 확대하는 공약을 내놨다. 초등돌봄교실·지역아동센터·다함께돌봄센터 등을 통합해 온종일 돌봄체계를 구축하고, 자녀 출산시 부모 모두 육아휴직이 자동으로 신청되는 ‘자동 육아휴직등록제’도 발표했다. 노동시장 차별 개선 방안을 내놨다는 점에서는 윤석열 후보 쪽보다 한발 나아갔다. 우선 공공 분야부터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고용평등임금공시제’를 도입하고, 채용 단계에서 성차별을 방지하도록 법을 개정하겠다는 방향도 밝혔다. 아울러 주 4.5일 근무제 논의와 함께 가족돌봄휴가제 확대 등 소득 감소 없이 실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정책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심상정 후보의 정책도 비슷하다. △성평등임금공시제 도입과 성별임금격차해소법 제정 △주 4일제 도입 △방과후 돌봄지원 법제화와 학교 돌봄교실 확충 △육아휴직급여 소득대체율 인상과 육아휴직 대체인력지원센터 설립 등을 공약으로 내놨다. 심 후보의 공약에서 독특하게 눈에 띄는 부분은 ‘생애주기별 노동시간 선택제’와 ‘돌봄자 수당’ 도입이다. 생애주기 노동시간 선택제는 출산·육아가 여성의 노동시장 이탈 요인이 되지 않도록 필요한 생애주기에 시간제 근무를 신청한 뒤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전일제로 자유롭게 복귀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제도다. 시간제로 일할 때도 사회보험, 임금, 노동조건 등에서 전일제 노동자와 차별이 없게 하고 경력 개발, 승진 기회를 동등하게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한다. ‘돌봄자 수당’이란 영국에서 실시하는 제도로, 요양보호사처럼 임금노동을 하는 돌봄노동자가 아니라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전업주부, 회사를 잠시 쉬고 아픈 부모를 간호하는 노동자 등에게 수당을 주겠다는 것이다.
여성단체 등은 이재명, 심상정 후보의 공약이 모두 필요한 제도이긴 하지만 ‘속 빈 강정’이 될 것을 우려한다. “(돌봄을 바라보는 사회 인식 틀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뒤틀린 구조를 놔둔 상태에서 복지 수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것이다.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전국여성노동조합은 2월17일 국회 앞에서 ‘여성노동자가 요구하는 대선 의제 발표’ 기자회견을 열어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로 이어지는 성장 중심의 경제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서로 의존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돌봄 중심의 탈성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밝혔다. 모두가 ‘노동자-돌봄자-시민’인 다중 정체성을 기반으로 돌봄 정책을 통합하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들 단체는 돌봄 중심 사회를 국가운영 철학으로 채택하고, 좋은 돌봄을 받을 권리와 좋은 돌봄을 할 권리를 명시한 ‘돌봄기본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했다. “여성노동자 중 시간제 노동자 비중이 25.7%(2020년 기준)다. 주당 15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초단시간 노동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전국 단위의 사회서비스원을 설립해 돌봄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나온 요구사항들이다.
양난주 대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아이돌보미서비스 등) 형식적으로 보장된 공식 돌봄서비스가 있는데도 가정 안에서 여성의 부담은 줄지 않고 있다”며 “돌봄을 경제성장의 불쏘시개로 여기는 관점에서 벗어나 국가가 해야 할 사회적 책임 측면에서 돌봄이 더 많이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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