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이 비밀활동을 위해 서울에 처음 잠입한 때는 1922년 7월이었다. 26살 때의 일이었다. 그는 밀입국하던 전후 사정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1년 8월 국제당 극동비서부에 의해 국제공청 해외뷰로 전권위원 자격으로 상해에 파견됐다. 1922년 7월 말 국제공청 해외뷰로 업무차 서울에 체류했다. 9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공청 제3차 대회에 파견됐다.”1
이력서 등속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건조한 문장이다. 하지만 문장마다 두텁고 복잡한 서사가 배후에 깔렸음을 느끼게 한다. 국제당, 국제공청, 상해, 모스크바 등의 어휘가 그런 느낌을 준다.
서울에 몰래 들어온 당시 그의 직책이 드러나 있다. ‘국제공청 해외뷰로 전권위원’이었다. 국제공청이란 ‘국제공산청년회’라는 단체의 줄임말로, 1919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창립대회를 가진 국제기구였다. 1921년 7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대회부터 비(非)서구 여러 민족의 사회주의 청년운동도 포함하는 명실상부한 국제기구가 됐다. 조훈은 바로 그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놀랍다. 32명의 사관생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랄산맥 페름현 나제진스크 목재소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하던 무명 청년이 불과 4년 만에 국제대회의 조선 대표로 선임된 점이 말이다. 도대체 4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관생도 다수가 연해주로 되돌아간 데 반해, 조훈을 비롯한 4명의 생도는 현지에 잔류하는 길을 택했다. 그 의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상급학교 진학을 희망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대도시 예카테린부르크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세탁소 고용원, 담배말이 노동 등에 종사했다. 러시아 내전이 소용돌이치던 시절이다. 조훈도 시베리아 일대에서 내전에 휩쓸렸다. 적위파 일원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한때 재판도 없이 총살당할 뻔한 위기도 겪었다. 1919년 10월에는 이르쿠츠크에서 평생의 동지 남만춘을 만났다. 그보다 5살 연상의 믿음직한 선배였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상 ‘이르쿠츠크파’라고 불리는 공산주의 그룹의 중추 멤버로 성장했다. 조훈이 국제공청 제2차 대회에 조선 대표로 나가게 된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제2차 대회에서 조훈은 국제공청 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아울러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청 극동비서부 위원직도 차지했다. 이 기관은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지휘하는 부서였다. 조훈이 관장하는 지역은 그의 조국인 조선이었다. 조선 내지에 국제공청 지부를 결성해 신진 세대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을 보급하는 것이 그의 소임이었다.
조훈은 기민한 사람이었다. 국제공청 제2차 대회가 끝난 지 불과 한 달 만에 고려공산청년회 집행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1921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였다. 집행부를 ‘중앙총국’이라고 불렀다. 위원은 5명이었다. 국제공청을 대리하는 조훈 자신 외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파견한 위원 1명, 각지 공청 세포기관에서 발탁한 위원 3명이 구성원이었다. 상하이 공청 세포기관에서 온 박헌영이 그 속에 포함된 점이 이채롭다.2
고려공청 중앙총국의 긴급한 과제는 활동 근거지를 조선 내지로 옮기는 데 있었다. 조훈은 그 과제 수행을 위한 거점으로 상하이를 선택했다. 국내로 공청 기반을 옮기는 데는 그곳이 최적의 중개 기지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 각종 단체와 비밀결사가 잠행하는 곳이고, 갖가지 이상을 품고서 몰려온 조선인 망명객과 청년들이 은신하는 대도시였기 때문이다. 조훈은 중앙총국 위원진을 재구성했다. 5명이었다. 국내 공작을 수행하는 데 적합한 인물들로 새로운 진용을 짰다.
1922년 중앙총국 소재지를 국내로 이전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중앙총국 5명 위원 가운데 조훈은 상하이에서 국제공청과의 연락을 맡고, 다른 4명은 모두 국내에 잠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원활하게 집행되지 못했다. 책임비서 박헌영과 총국의 두 위원 김단야와 임원근이 국경선을 넘는 도중에 체포됐기 때문이다. 잠입에 성공한 위원은 고준 한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혼자로는 역부족이었다. 수개월 동안 고준이 조직한 세포단체는 단 1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조훈은 1922년 7월 조선으로 직접 잠입하기로 결심했다.
밀입국 때 사용한 위조 신분증이 남아 있다. 그는 중국 광둥중학교에 유학 중인 조선의 전라북도 무주군 출신 김창일(25)로 행세했다. 신분증은 정교했다. 한문 활판으로 인쇄된 증명서 양식에 고유명사를 세필로 써넣은 증명서였다. 인지 석 장이 붙어 있고, 광둥중학교장 야오궈시의 개인 도장에다, 학교장 직인까지 붉게 찍힌 감쪽같은 재학증명서였다.3 2학년을 마친 뒤 질병으로 휴학했으며, 치료차 고국에 돌아온 중국 유학생인 것처럼 꾸몄다.
서울에 무사히 안착한 조훈은 공청 조직운동의 방향을 바꿨다. 독자적으로 세포를 늘려가는 대신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국내에서 왕성한 사회주의 운동 열기를 이끄는 비밀결사 대표들을 고려공청 중앙총국 위원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새로운 중앙총국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 형성된 간부진이라는 의미로 ‘고려공청 제3차 중앙총국’이라고 불렀다. 위원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5명이었다. 종래의 두 위원에 더해 3명을 받아들였다. ‘내지당’ 혹은 ‘중립당’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신생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대표 김사국, 대중적 영향력을 지닌 공개단체 노동연맹회 대표 전우, 서울청년회 대표 김사민이 그들이다.4 책임비서에는 김사민이 선임됐다. 당시 국내 사회주의 운동의 실제를 잘 반영한, 최선의 인선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울 한복판에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설립한 직후 조훈은 다시 국외로 빠져나갔다. 국제공청과의 연락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1922년 9월의 일이었다. 서울에 비합법적으로 체류한 지 한 달 남짓했을 뿐인데도, 획기적인 성과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국경 밖으로 빠져나가는 그의 어깨에는 그해 12월 개최 예정인 국제공청 제3차 대회에 출석할 고려공청의 대표자라는 자격이 부가돼 있었다.
조훈이 다시 국내로 잠입한 때는 1년6개월이 지나서였다. 1924년 2월 두 번째로 서울에 나타났다. 그의 <자서전>을 들여다보자.
“1924년 2월부터 5월까지 국제공청집행부 전권위원 자격으로 조선에서 활동했다. 6월 국제공청 제4차 대회에 참석했고, 국제공청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두 번째로 잠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조선 내지에 설립한 고려공청 중앙총국 위원이 둘로 분열됐기 때문이다. 분열을 낳은 문제는 국외 기반의 기존 두 세력(상해당·이르쿠츠크당)을 공산당 건설에 포함할지였다. 책임비서 김사민과 당대표 김사국은 두 세력의 배제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공고한 공산당을 건설하려면 국내 대중에 기반을 둬야 하고, 국외 두 세력은 과오가 많았기 때문이다.
의열투쟁의 전술 적합성 문제도 분열을 낳은 또 하나의 진원이었다. 김사국 그룹은 의열투쟁을 반대했다. 그것은 대중 속에 투쟁 의욕을 북돋기는커녕 광범한 대중과 혁명 세력을 유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었다. 따라서 의열단과 제휴해 폭탄 반입을 추진하는 내지당의 다른 간부들에게 반발했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고려총국 중앙총국 위원직을 사임했고, 내지당에서도 탈당했다. 대신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해 독자 노선을 걸었다. 이 비밀결사는 합법단체 서울청년회를 거점으로 삼아서 활동했기에 ‘서울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분열은 조선혁명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비밀운동은 물론이고 공개 합법 영역에도 그랬다. 국제공청 집행부는 갈라진 두 그룹이 통합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양자 통합을 실행하는 책임을 조훈에게 부여했다. 조훈은 ‘국제공청 집행부 전권위원’ 자격으로 통합 공청을 실현하는 소임을 띠고서 국내로 잠입했다.
조훈은 자신의 소임을 두 단계로 나눠서 추진했다. 첫 단계는 이완된 고려공청 중앙총국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책임비서 직위에 있던 신철을 해임하고, 중앙총국을 새 위원들로 재조직했다. 1923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책임비서 자격으로 국내 공산청년운동을 이끈 신철이 해임된 이유는 ‘사보타주’ 혐의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제공청 집행부 전권위원 조훈의 권한 행사 범위가 넓고도 강력했음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중앙총국 위원진의 중핵은 일찍이 1922년 3월 밀입국 도중에 체포된 트로이카(삼두마차)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이었다. 그들은 출옥하자마자 곧바로 비밀결사운동에 복귀했음을 알 수 있다.5
두 번째 단계는 통합 공청을 결성하기 위해 고려공산청년회창립대회준비위원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 내에는 조훈의 과업 수행에 유리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대통합 움직임이 일었다. 합법 공개 영역의 청년운동도 그랬고, 비밀 사회주의 운동도 그랬다. 국내에 존재하는 내지당과 고려공산동맹, 양대 비밀결사가 주동이 되어 ‘6인회’라는 명칭의 조선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를 출범했다. 그 덕분에 조훈이 추진하는 고려공청 통합운동은 6인회가 이끄는 공산당 통합운동과 나란히 굴러갈 수 있었다.
실패한 두 번째 밀입국, 그러나 망외의 소득양대 공청 그룹의 협상 테이블이 가동됐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가 논의 석상에 올랐다. 고려공청 중앙총국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해산할 수 있는지, ‘6인회’로 대표되는 공산당 지도부의 지휘를 받을지, 국외에 소재하는 공산그룹들과 연계를 단절할지, 통합 공청대회 대의원을 야체이카(세포단체)에서 선출할지 아니면 개인별로 초청할지 등이 쟁점이 됐다.
그러나 조훈은 1924년 5월 출국할 때까지 자신의 소임을 완성하지 못했다. 통합 공청 결성은 달성하기 어려운 난제였기 때문이다.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비록 통합 공청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 뒤 공청 운동의 큰 흐름이 되는 근간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의 두 번째 밀입국이 거둔 망외의 소득이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훈 동무의 자서전 (Автобиография тов.Те-Хуна), 3쪽, 1927년 3월28일, РГАСПИ ф.531 оп.1 д.247 л.14-17
2. 작자 미상, <高共靑一般進行情況> 1쪽,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908 л.1-11
3. 廣東中學校, <修業證書, 金昌一>, 중화민국11년(1922) 5월2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5
4. <高共靑一般進行情況>, 4쪽
5. 윤상원, ‘국제공산당과 국제공산청년회 속의 한인 혁명가’, <마르크스주의 연구> 55, 경상대학교,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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