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 선수가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공을 올린다.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라는 노래 <상록수>가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1998년 이후 이 장면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나는 아직도 눈가가 벌게진다. 박세리 선수의 하얀 발은 불굴의 노력을 보여줬고, 선진국 스포츠인 골프 대회 우승을 이끈 마법 같은 샷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지 않았던가. ‘대한민국 만세’ 삼창이 절로 나온다.
감각이란 그런 것이다.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어떻다고 비판하면서도 올림픽이 선보이는 정점에 선 선수들의 기량에 마음을 빼앗긴다. 이번 일본 도쿄올림픽에서 메달과 순위에 집착하지 않는 시민의 반응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심리적 부담감을 이유로 경기 출전을 포기한 미국 체조선수 시몬 바일스에게 찬사가 쏟아지고, 메달보다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선수들이 만족할 경기를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며 박수를 보냈다.
반면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올림픽 때문에 쫓겨나는 이들이다. 도쿄올림픽을 위해 경기장 인근 공공주택 가스미가오카에 살던 400여 가구 주민들은 강제이주했다. 홈리스(노숙인)의 강제퇴거도 이어졌다. 도쿄공원의 문을 닫고, 홈리스가 잠을 잘 수 없도록 밤에도 조명을 환하게 켰다. 영국 방송 BBC 보도에 따르면 이들을 퇴거시키는 집행관은 “올림픽 기간에 스스로 숨어 있으라”라고 말했다. 올림픽경기장 인근 공터에 살던 야마다도 강제퇴거 고지를 받았다.
도시의 빈민은 올림픽을 비롯해 국제회의 등 대형 국제 행사가 열릴 때마다 치워졌다. 2016년 브라질 리우올림픽은 7만 명, 2008년 중국 베이징올림픽은 150만 명을 쫓아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은 1만1천 명을 쫓아냈는데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국제경기와 국제회의를 비롯해 메가 이벤트를 여는 모든 도시에서 반복된 일이다.
올림픽 퇴거는 원활한 경기를 위해 자리를 잠시 내주는 일이 아니다. 올림픽 개최를 위해 투여되는 공적자금은 경기장 일대 부동산 투자자와 건설회사를 비롯한 올림픽 산업 관계자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지만, 퇴거는 가난한 이들에게 집중된다. 강제퇴거의 결과는 도시에 머무는 이들의 지형을 바꾸는 ‘계급 청소’다. 올림픽에 도달하는 길은 불평등의 지렛대였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도 쫓겨난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에 사용할 슬로프를 만드는 데 가리왕산에서 나무 10만 그루가 잘려나갔다. 1997년 무주·전주 겨울 유니버시아드대회에는 덕유산 230만 평이 파괴됐다. 가리왕산의 500년 원시림과 덕유산의 구상나무 군락지, 고산 습지가 철거됐다.
그러나 철거에 반대하는 이들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경기가 시작되면 모두 즐거운 스포츠의 세계에 빠져들고, 국가적 행사를 치른다는 홍보가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제주 인구보다 많이 쫓겨난 1988년1988년 서울올림픽은 72만 명을 쫓아냈다. 제주도 인구가 69만 명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쫓겨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빈민가에서 일어난 폭력적인 철거는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사망자 14명을 발생시켰다. 어린이도 희생됐다. 강제철거로 불안정해진 담벼락이 무너지며 국민학교 2학년 오동근 어린이가 세상을 떠났다.
대형 경기장과 깔끔한 선수촌은 가난한 이들의 지옥 위에 만들어졌다. 브라질 시민들은 월드컵과 올림픽에 투여될 공적자금으로 공공의료와 더 나은 교육, 대중교통을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올림픽의 비용은 얼마인가? 올림픽으로 확대된 불평등은 비용으로 측정된 바 없지만, 누군가는 이 비용을 삶으로 치렀다.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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