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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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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받지 못한 피해자의 모멸감

재판을 거치며 자살·자해를 시도하는 피해자들,
증인 지원 절차 정비됐지만 피해자의 회피·불안 여전
등록 2021-06-29 02:18 수정 2021-06-29 10:21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일러스트레이션 ‘리셋’ 임우정

“사건 이후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해 현재 인공호흡기 없이 생존이 어려운 처지에 있고….”

서울북부지법 판결문 속에 양형 이유로 짧게 등장하는 피해자 상태를 보고 재판을 거치며 자살·자해를 시도하는 이들이 떠올랐다. 재판 절차가 피해 회복이나 일상 재구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는지 의심이 들고 피해자에게 재판 절차에 적극 참여하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성폭력 피해를 입으면 ‘법대로 하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 관심이 없다. ‘피해자 진술로 유죄’라며 일관되고 신빙성 있는 진술을 하는 게 쉬운 것처럼 묘사하지만, 정작 피해자는 진술 뒤 자살·자해를 시도할 만큼 추가 피해를 입는다.

2010년 피해자 사망 뒤 절차 정비

2010년 피해자가 서울중앙지법 증인신문에서 겪은 모멸과 고통을 토로한 유서를 남긴 채 사망했다. 이후 법원은 증인지원관 제도 도입 등 증인 지원 절차를 정비했다. 그 결과 피해자를 포함한 증인들은 증언 전후 동행과 보호, 비공개 심리, 피고인과 접촉 차단, 신뢰관계인 동석, 재판 결과 통지 등을 선택할 수 있었다. 각 법원에는 피해자가 안심하고 대기하는 증인지원관실이 별도로 있다. 그곳에서 피해자는 안전하게 있다가 별도의 통로로 법정에 들어가 증언한 뒤 귀가할 수 있다.

문제는 형식적 정비에 머무를 뿐 각 지원 절차가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평가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피해자는 부족한 정보 속에서 사법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일반인이라는 한계를 안고 증인신문을 할 때 증인석에 혼자 앉아야 한다. 피해자가 증인신문을 두려워하며 회피하는 이유에 대한 법원의 깊이 있는 접근이 부족하니, 피해자는 형사사법 절차를 불신하게 된다.

2019년 성폭행 피해자를 설문조사한 결과, 많은 피해자가 증인 지원 절차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어 각 절차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또한 증인지원관실 외 법원 공간에서 보호장치가 없어 법원에 오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증인신문 때도 피해자는 피고인의 퇴정(면전에서 충분한 진술을 할 수 없다고 인정한 때 피고인을 재판정에서 내보내는 조치), 즉 피고인과의 공간 분리를 요구한다.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등을 이유로 차폐막 정도로 충분하다고 보는 법조계 관행과 차이가 있다. 신뢰관계인 동석 역시 어떻게 활용하는지 아는 피해자가 적다. 신뢰관계인 동석이 허가되더라도 증인석 왼쪽 뒤편이라서 피해자 눈에 들어오지 않아 증인석에 앉은 피해자는 불안해한다.

피해자 증인신문 과정을 충실히 사전에 설명하는 재판부도 찾기 어렵다. ‘기억나는 대로 차분하게만 답변하면 된다’라는 추상적인 조언만 한다. 그래서 증인신문 중 무엇을 요구할 수 있고 어떤 태도까지 용인되는지 알지 못해 당황하는 피해자가 많다. 부적절한 피고인 쪽 신문을 재판부가 제지하지 않아 고통을 겪는 일도 다반사다.

부적절한 질문, 사전 검토하는 재판부 없어

2015년 사법정책연구원이 펴낸 ‘성폭력 재판 절차에서의 피해자 증인신문 재판참고사항에 관한 연구’를 보면 부적절한 신문 유형을 △과도하게 괴롭히거나 겁을 주거나 공격적인 질문 △빈정거리거나 모욕하거나 폄하하는 질문 △집요하고 반복적인 질문 △성관계 행위 내지 신체적 특징을 불필요하고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도록 하는 질문 △피해자의 사생활 내지 성적 행위 이력에 관한 질문 등으로 정리했다. 각 상황의 사례를 설명하고 적절한 소송지휘를 권하지만, 현실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내세워 부적절한 질문을 재판부가 여전히 방치하고 있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남자라면 이런 상황을 동의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어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클럽에 가거나 모텔에 남성과 투숙하는 것은 성관계 동의로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본인이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남성 혐오감을 갖고 있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등의 질문이 쏟아진다. 피해자는 증인석에서 이런 질문을 날것으로 접하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재판부가 신문 사항을 미리 보고 검사와 피고인 변호인에게 부적절한 질문을 제외하도록 요청하면 좋은데 이를 구현하는 재판부를 찾기는 어렵다. 대개는 부적절한 신문이 이어질 경우 개입해 제지하는 방식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그때는 질문 자체로 피해자가 고통을 당한 이후다. 추가 피해는 양형에 반영하면 된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법정에서 겪은 피해자의 고통이 양형에 적극적으로 반영된 판결을 찾기 어렵다. 부당함을 인지한 피해자가 증인석에서 항의하거나 문제제기하면 그것을 오히려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판단(“저 정도로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한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를 입었을 때 소극적으로 대처할 리 없다” 등)하기도 한다.

결국 피해자는 고통당한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취조에 가까운 신문을 견디며 모멸을 느껴야 한다. 형사사법 절차에 대한 피해자들의 회피와 불안, 불신은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피해자 증인신문으로 무엇을 지키려는가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해 세 곳(검사·피고인·재판부)에서 날아오는 질문에 내던져진 피해자를 뒤에서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증인신문 뒤 피해자와 계속 연락하며 신문 과정에서 겪은 추가 피해로 자살·자해를 시도하지 않는지 확인하고, 필요할 경우 병원에 데려가는 일을 개인이 감당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필요한 절차라고 피해자에게 강요만 할 뿐 누구 하나 피해자가 당하는 추가 피해에 책임지지 않는다.

피해자 증인신문이 왜 필요한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지키려는지 근본부터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엄격한 증명을 거쳐야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는 형사사법시스템 원칙이 피해자에 대한 추가 피해를 방조하고 부추기는 현 증인신문 절차에 대한 문제제기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본다. 물증 확보가 용이하지 않은 성범죄 재판의 특성상 피해자 진술이 필요하다면 그 당위만을 피해자에게 강요하지 말고 각 절차에 따른 추가 피해를 막는 방식을 더 고민해야 한다.

사건 이후 지난 1년간, 그리고 올 2월 증인신문 이후 6월 선고까지 피해자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을 얹기 어렵다. 부디 피해자가 스스로 호흡할 수 있기를 부디 그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피고인만 항소한 해당 재판을 계속 따라가 소식을 전하겠다.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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