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직장’은 모호하고 ‘괴롭힘’은 확실하고

법의 보호에서 배제되는 노예 대학원생과 생트집 잡힌 경비원,
‘괴롭힘의 상대방’ 위치와 고용형태에 따라 근로기준법 적용 달라져
등록 2021-06-29 02:14 수정 2021-06-29 10:22
2020년 5월12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시민사회단체가 고 최희석 경비노동자 추모 긴급 기자회견을 열기에 앞서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2020년 5월12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한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시민사회단체가 고 최희석 경비노동자 추모 긴급 기자회견을 열기에 앞서 시민들이 헌화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직장인 ㄱ씨는 낮에 직장에서 겪은 일을 떠올리자 다시 호흡이 가빠졌다. 상사가 업무와 무관한 일로 생트집을 잡고 고성을 지르더니 쓰레기통을 들어 바닥에 쏟고 “당장 치우라”라고 했다. 모욕적이고 황당한 폭언을 들은 그는 억울함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사내 고충처리위원회에 ‘직장 내 괴롭힘 행위자’로 상사를 신고하기로 했다. 만약 ㄱ씨의 직업이 ‘아파트 경비원’이었다면, 똑같은 만행을 저지른 사람이 직장 상사가 아닌 그가 근무하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입주민’이었다면 어땠을까?

또 다른 직장인 ㄴ씨는 오늘도 한밤중에 울리는 카톡 알림음에 두통이 재발했다. 퇴근 시간 이후, 휴일 가릴 것 없이 상사의 업무 지시가 내려진다. 지시 종류는 업무에 국한되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회식 참석을 강요하고, 종종 상사의 개인 물품 구매 심부름을 시킨 뒤 물품값을 주지 않는 일도 많았다. ㄴ씨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노동청에 ‘직장 내 괴롭힘 진정’을 제기했다. ㄴ씨의 일터를 사무실이 아니라 대학 내 ‘연구실’로 옮긴다면? ‘대학원생’으로 불리는 ㄴ씨에게 수시로 부당한 지시와 강요, 해고 협박을 일삼은 당사자는 ㄴ씨의 논문과 졸업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쥔 ‘지도교수’였다.

경비원 ㄱ씨와 대학원생 ㄴ씨는 ‘법’ 앞에선 한없이 무기력해진다.

대학원생은 서면 계약서부터 작성

두 사례는 사단법인 직장갑질119에 제보된 실제 이야기다. 누가 봐도 권력을 쥔 자가 행한 ‘갑질’이자 ‘괴롭힘’ 행위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다만 현행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이들에게 부당하고 억울한 일들에 대해 법적으로 구제받을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법 이름에서 드러나듯, 2019년 7월16일부터 시행된 근로기준법 제76조 2의 ‘직장 내 괴롭힘의 금지’ 조항은 ‘직장 내’에서 벌어진 괴롭힘을 규제한다. 직장 내 괴롭힘 행위자는 ‘사용자 또는 근로자’이며 피해를 당한 근로자와 동일한 사용자와 근로관계를 맺은 자로 국한된다. 경비원 ㄱ씨의 사례로 돌아가보면 당연히 피해자 ㄱ씨는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아야 할 법률상 ‘근로자’이지만, 가해자는 ㄱ씨 같은 용역업체 소속 동료가 아니라 입주민이라는 이유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상 ‘행위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대학원생 ㄴ씨의 경우는 경계에서 좀더 멀리 밀려난다. 2020년 11월 직장갑질119가 대학원생 586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65.2%가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학업과 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연구노동자’라고 답했다. 응답자들이 말한 ‘학내에서 겪은 부당행위’ 사례는 직장갑질119가 지난 4년여간 제보받은 모든 종류의 갑질을 망라했다. 대학원생 자신이 ‘노예’로 지칭할 만큼 교수 등에 종속된 관계에서 ‘강도 높은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이들은 보통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

일하는 모습이 근로자임이 분명한 대학원생을 법 테두리 내로 포함하려는 입법화 작업과 더불어,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보자. 먼저 이들의 노동시간, 업무 내용, 금지되는 괴롭힘 행위 등을 명시한 서면 계약서부터 작성할 수 있다. 각 대학에 설치된 인권센터 등은 교수의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접수됐을 때 법의 잣대로만 ‘사용자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연구노동자’로서 대학원생의 ‘인권’과 ‘노동권 보장’ 측면에서 더 적극적으로 ‘괴롭힘 행위자’에게 실효성 있는 사후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경비원은 ‘업무 중단’ 요구 가능

‘일하는 사람’이 일터에서 일하다가 권력을 가진 누군가로부터 ‘업무와 무관한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고통에 빠졌다면, 현행법상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니라고 볼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어떤 노동자는 괴롭힘의 상대방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에 따라, 자신의 고용형태에 따라 법의 보호 영역에서 배제된다. 대표적으로 원청회사 관리자 등이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에게 행하는 괴롭힘도 법의 보호 대상이 아니다. 하청노동자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의 상대방이 ‘같은 회사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합리한 구조를 잘 알기에 ‘갑 중의 갑’이라는 원청의 직장 내 괴롭힘 사례는 종종 ‘수위’를 넘어선다. ‘작업반장 맘에 안 든다’고 자르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며 폭행하고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위험한 일은 모두 하청노동자에게 떠맡긴 뒤 큰 사고가 나도 책임지지 않는다.

최근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2021년 10월4일부터 경비원이 입주민을 포함한 제3자에게서 폭언 등을 들을 경우 사용자에게 업무 중단 등을 요구할 수 있다. 기존에는 경비원을 제외한 ‘고객응대근로자’(감정노동자)에게만 허락됐던 법적 권리다. 궁극적으로 경비원의 실질적인 사용자에 해당하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용역업체와 함께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포함해 모든 노동관계법령상 ‘사용자 책임’을 지도록 공동주택관리법 등을 개정해야 한다.

‘피해 노동자’ 보호라도 하도록

단시일에 법을 개정하는 것이 어렵다면 직장 내 괴롭힘 진정 사건을 접수해 처리하는 고용노동부가 특수관계인·입주민 등이 가해자인 경우 법률로 규정한 ‘피해 노동자’ 보호만이라도 조치하도록 시정명령 등을 적극적으로 내려야 한다.

공동주택관리법 제65조 2에는 이미 “입주자 등 입주자대표회의 및 관리주체 등은 경비원 등 근로자의 처우개선과 인권존중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법조항에서 눈에 띄는 네 글자는 ‘인권존중’이다. 누구든 일하는 곳에서 고통받지 않고 ‘인간답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법 이전에 인권의 문제다. 인권의 경계를 법으로만 그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김유경 직장갑질119 운영위원·돌꽃노동법률사무소 대표 노무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