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대법원의 상고심 제도 개선을 위한 토론회를 앞두고 장창국 의정부지법 부장판사가 18일 법원 내부망에 '대법원 스스로 일을 줄여야 합니다. 특히 성폭력 사건은 아예 단심제로 하든지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하급심의 무죄 판단을 존중하지 않고 대법원이 유죄 취지의 판결만 내린다며, 대법원이 스스로 일을 만들고 있다는 취지의 비판글이다. 반성폭력 활동가 마녀가 이 글을 언론 보도를 통해 읽고 장창국 판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_편집자
“특히 성폭력 사건 담당 1, 2심은 아우성이다. ‘부담 갖지 말고 유죄 판결해서 대법원으로 올려라’ ‘무죄 판결해봐야 대법원에서 파기된다’는 자조가 난무한다. 대법원이 ‘유죄 판결 법원’이 되었다고도 한다. (중략) 피고인과 증인, 당사자를 직접 만나 그들의 억울함 호소와 눈물, 표정을 본 판사와 그렇지 않고 조서를 비롯한 소송기록만 본 판사가 있다면 누구의 의견을 더 존중해야 할까? 사실인정 문제에 관한 한 대법관님들 생각이 옳다는 믿음을 잠깐 내려놓고 하급심 판사들을 믿어달라.”
안녕하십니까, 장창국 판사님.
지난 5월18일 오전 한 언론사에서 기사화한, 코트넷(법원 내부전산망)에 올라왔다는 글을 접한 뒤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폭력 사건의 무죄 판결에 대한 파기환송이 많아졌다면 하급심에 문제가 없는지 돌아볼 것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간 대법원 판례 때문에 하급심에서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책임을 대법원에 돌리던 하급심 법관들의 하소연에 반하는 목소리기도 해서 관심이 갔습니다. 피해 당사자이자 연대자로서, 그리고 성폭력 사건의 재판을 모니터링하는 활동가로서 이 편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판사가 피고인과 ‘라포’(상호 신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는 소외되는 게 현재 성폭력 하급심의 모습입니다. 법관이 당사자인 피고인에게 과몰입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지요.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피고인은판사의 공감을 사기 위해 여러 양형 자료를 만들어 제출하고, 거짓말해서라도 본인에게 유리한 말을 내뱉으며, 판사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고 호소하는 방법을 공유합니다. 법원 내부에서 이런 문제를 인식해 매뉴얼을 정비하고 외부 조언을 경청하며 발전하려는 판사들도 있는데, 이런 지적에 대해서는 어떤 성찰과 변화를 꾀하고 계시는지요.
지금 계시는 의정부지법만 해도 2021년 5월을 비롯해 최근 2~3년간 무죄를 선고했던 성폭력 사건 재판이 여러 차례 파기환송됐습니다. 피고인에게 과몰입해 피해자를 상대로 비합리적인 의심을 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몰이해를 당당히 드러내고, 기본적인 법리 이해가 부족한 사례입니다.
대학 동기가 강제추행한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의 피고인은 1심에서 유죄를 인정받아 징역 6개월이 선고됐지만 2심에서 무죄로 뒤바뀌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강제추행을 당한 피해자라고 하기에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사건 발생 뒤 2년 넘게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피고인의 사과문도 피해자를 달래려는 차원에서 작성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2021년 5월 대법원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피해자가 사건 발생 뒤 별다른 어색함이나 두려움 없이 피고인과 시간을 보낸 것을 두고 ‘마땅히 그러한 반응을 보여야 하는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고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할 수 없다.”
전철 강제추행 사건은 어떤가요. 2심은 이렇게 판단했습니다. “피해자가 추행 행위를 5분 동안이나 몰랐다는 건 믿기 힘들다. 사람이 많은 전동차 내에서 피고인에게 큰소리로 항의하고 피고인을 잡고 전동차 밖으로 끌어내린 뒤 경찰에 신고한 피해자의 태도에 비춰 적극적이고 용감한 성격인 피해자가 일정 시간 공소사실과 같은 정도의 피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참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이 사건도 2021년 3월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지요.
장 판사님 글처럼 대법원 판결이 소송기록만 본 판사들이 내린 결론이라 당사자를 직접 접하는 하급심 판사들의 판단보다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단언하려면 해당 기록의 수준이 어떤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성폭력 사건 하급심 재판은 충실하게 진행되지도 않고 재판부마다 그 수준이 현격히 차이가 납니다. 하급심에 대한 평가가 현실과 다르게 너무 후하십니다.
‘IP가 뭐냐’고 묻던 현직 판사들이 떠올라장 판사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지요. “대법원에서 생각하는 경험칙과 실제 세상의 경험칙이 다를 수 있다. 경험칙과 상식이라는 것이 자기가 경험한 세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나는 소년보호 사건을 담당하기 전까지는 요즘 청소년들의 혼숙 문화와 동성애 문화, 남친과 남사친, 여친과 여사친, 결혼이 다른지 알지 못했다.”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의 경험칙을 문제 삼기에 앞서 하급심 판사들이 내세우는 경험칙과 상식에 대한 성찰부터 하셔야 합니다.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는 현 청소년 세대와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 저 정도라면 장 판사님의 경험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입니다. 소수자에 대한 몰이해, 청소년 성관념에 대한 편협한 판단, ‘청소년 문화’의 핵심과 거리가 먼 용어를 나열해보니, 디지털성폭력에 대해 ‘IP가 뭐냐’고 묻던 현직 판사들이 떠올랐습니다. 판사님 글에는 “상급심에서 하급심 판사에게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됐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댓글도 달렸다더군요.
하급심 판사들의 인식이 세상과 얼마나 괴리됐는지 이제는 돌아볼 때입니다. 무죄를 선고한 사건들을 볼까요? 피고인에게 고기를 덜어주거나 그 앞에서 반지를 뺐다 꼈다는 것을 성관계 동의로 받아들였다는 피고인의 항변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피해자 몸에 외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10살 미만 아동 피해자의 진술이 부정확하다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작량감경’으로 형을 감경해주는 게 현실입니다.
장 판사님 글은 5월21일 열린 상고제도 개선 토론회와 연관됐겠지요. 상고심이 일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하급심을 믿고 맡겨달라는 건데, 이런 글을 쓰기에 앞서 문제가 된 하급심부터 돌아보기를 재차 권합니다. 장 판사님은 재판의 독립성 보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여러 번 의견을 내신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독립성 보장과 그 결과물에 대한 평가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재판의 독립성은 책임을 전제로 보장되고 평가에 겸허할 때 지켜질 수 있습니다. 변화는 하기 싫고 자신이 내린 판단에 대한 문제제기를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 하급심에 대한 신뢰는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요.
사법시스템을 신뢰해 재판을 선택한 피해자들은 자살·자해 충동에 시달리고, 일부는 몰리다 못해 삶을 포기합니다. 장 판사님 글에는 피해자의 자리가 없습니다.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자신의 굳은 사고를 유연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성찰하려는 자세를 지닌 판사와 그렇지 않은 판사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질 것입니다. 장 판사님 자리가 어디에 있을지 계속 지켜보며 기록하고 알리겠습니다. 그럼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https://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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