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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은 어디든 존재한다 [너머n]

드라마에선 양진호 모델로 한 인물에게 사적 복수 가하는 것으로 쾌감 주지만,
현실의 피해자 고통 담지 못해
등록 2021-05-16 16:21 수정 2021-05-20 02:16
SBS 드라마 <모범택시>의 등장인물 박양진이 사적 복수를 당하는 장면. 드라마 장면 갈무리

SBS 드라마 <모범택시>의 등장인물 박양진이 사적 복수를 당하는 장면. 드라마 장면 갈무리

“피고인은 억울한 점이 많습니다. 웹하드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2021년 5월3일 수원지법 성남지원 제3호 법정에서 피고인 양진호 쪽 변호인이 재판부(형사제1부 재판장 조승우)에 이렇게 말했다. 사전에 제출한 60쪽에 이르는 의견서를 통해 양진호 쪽은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 그중에는 헤비업로더에 의한 ‘음란물 끌어올리기’, 즉 불법촬영물 등 각종 성착취·성폭력 영상물 게시를 통한 유포 행위를 방조한 혐의(정보통신망법 위반 방조 등)도 포함됐다. 양진호와 함께 기소된 뒤 동일한 로펌의 조력을 받는 이지원인터넷서비스, 선한아이디, 한국인터넷기술원 같은 회사도 같은 주장을 펼치며 혐의를 부인했다.

‘법원권근’을 바라게 하는 현실

오전 10시에 열릴 예정이던 이 사건 재판은 사건의 중요성을 고려해 다른 사건들을 먼저 처리한 뒤 진행됐다. 당일 방청석에는 언론사 기자는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외부의 관심이 줄었다는 방증이다.

피고인 양진호는 2019년 기소됐다. 그러나 디지털성범죄 핵심 혐의 중 하나인 음란물 유포 방조 등은 ‘갑질 사건’과 동시 진행되다가 1심 선고 전에 분리됐고, 이후 저작권법 위반 등 다른 사건들과 병합되면서 2021년에 재판이 시작됐다. 피고인 쪽은 횡령과 배임 등 다른 건을 먼저 처리하고, 웹하드 카르텔 관련 부분, 즉 음란물 유포 방조, 저작권법 위반 등은 나중에 다루자고 했다. 앞선 재판에서 일명 ‘갑질 사건’(강요, 상습폭행, 정보통신망 침해, 공동상해 등 총 7개 혐의)으로 이미 징역 5년의 유죄가 확정됐기에 급하게 재판을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엔(n)번방 방지법’에 따라, 웹하드 사업자 등의 책임을 강하게 묻는 방식으로 전기통신사업법이 개정됐지만 이 사건은 법 개정 이전에 발생해 그 법을 적용받지 않는다. 따라서 ‘방조’로 기소됐고 검찰 입증이 치밀하지 않으면 또 선처받을 수 있다. 긴 호흡이 필요한 싸움이다.

드라마와는 다른 전개다. SBS 드라마 <모범택시>는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했는데 최근 양진호를 모델로 한 인물 에피소드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드라마는 등장인물 ‘박양진’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양진호와 관련된 ‘갑질 사건’과 ‘웹하드 카르텔’을 정조준했다. 사망한 피해자의 가족이 사적 복수에 참여하고, 물리적 폭력으로 가해자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박양진의 폭사(폭발로 말미암아 죽음)로 에피소드는 마무리된다. ‘법원권근’(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이라는 드라마 속 삽입 문구로 집약할 수 있는 문제 해결로 대리만족을 느끼게 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웹하드 업체-필터링 업체-디지털 장의사-헤비업로더의 담합으로 구성된 ‘웹하드 카르텔’은 수사기관의 태만과 법원의 관대함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양진호는 2011년 웹하드 업체 위디스크와 파일노리 내에서 ‘누리진’이라는 비밀 업로드 조직을 운영하다 발각됐다. 그는 2011년 저작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까지는 됐으나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웹하드 카르텔은 발각되지 않아 처벌되지 못했다. 양진호와 그 일당이 호화 변호인단의 조력을 받아 재판에 임하면서 웹하드에 대한 편견 없이 사건을 살펴봐달라는 후안무치한 주장을 하는 이유도 사법시스템이 자기편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재판을 견디느니 사적 복수가 낫지 않겠어?

그럼에도 드라마를 보며 통쾌하지도 대리만족을 느끼지도 못했다.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들은 이 드라마의 시청을 힘들어한다. 물론 피해자들이 길고도 고통스러운 수사·재판 과정을 견디느니 차라리 사적 복수를 하는 편이 낫지 않냐는 말을 주고받곤 한다. 경찰에 신고·고소하고 재판받으며 또 다른 피해를 보면서까지 왜 버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고소하고 재판을 거치면서 모든 것을 잃었던 나도 사적 복수를 상상한 적이 있다. 출소한 가해자로부터 보복당할 위험이 있다며 도와달라는 내게, 실제 피해가 생기면 오라던 수사기관의 대응에 절망했을 때다.

드라마는 사건을 일시적으로 환기하거나 제3자에게 ‘사이다’적 쾌감을 줄 수는 있겠지만, 정작 현실 속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워했다. 사망한 피해자의 서사를 넣어 활용하는 부분도, 상세한 피해 묘사도 그것을 보는 피해자에게는 피해에 대한 끔찍한 복기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서버가 있는 곳으로 묘사된 ‘광산’을 날린다고 해서, 박양진이 폭사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디지털 환경에서는 언제든 그 광산이 부활할 수 있고, 광산을 날린다고 해도 그 잔해가 원본과 다를 바 없이 독한 연기를 뿜는다.

폭력을 동반한 응징이 주는 쾌감은 짧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길다. 모든 피해자가 자신을 대변할 그런 다크히어로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에는 가해자 응징과 함께 반드시 고려해야 할 수습 과정도 빠져 있다.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걸 피해자들도 안다. 드라마에서 피해자 서사는 늘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피해자는 현실을 살아가는, 숨 쉬는 존재다. 그걸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자주 잊는다. 그 때문에 피해자들이 힘들어한다.

그래서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뒤틀린 시스템이 가해자·강자·다수자를 위해 기능하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시스템의 붕괴와 부재가 피해자·약자·소수자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길 수 있음을 기억한다. 시스템을 통한 문제 해결이 피해자에게 선택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활동을 이어나간다.

본격 재판은 2021년 하반기에나 시작돼

“너 여기만 광산인 것 같지? 나한테 50원, 100원 내고 다운로드 받아가는 그 개새끼들이 다 내 광산이야!”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유일하게 와닿았던 부분이다. 현실에서 ‘광산’은 어디든 존재한다. 디지털 환경의 특성상 원본과 복사본의 차이가 없고 언제든 저장, 변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양진호는 수감됐지만 여전히 그는 이 광산들을 통해 수익을 얻고 있다. 구속되지 않은 양진호의 주변인들이 그 광산에서 채굴 작업을 진행 중이며, 그렇게 얻은 이익은 또 피고인 양진호를 방어하는 데 쓰인다. ‘광산’들은 발전하는 디지털 환경에 맞춰 진화한다. 피해자를 직접 물색해 착취·폭력을 저지르며, 스스로 제작·유통을 해서 개인적 욕망과 욕구를 충족하거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형태로 변하고 있다.

양진호의 다음 재판은 7월6일이다. 이도 ‘횡령, 배임 등’에 관한 부분이다. 2018년부터 계속 언급해온 ‘웹하드 카르텔’ 관련 재판은 2021년 하반기에나 시작할 가능성이 크다. 양진호 쪽은 최대한 시간을 끌 것이다. 망각을 유도하는 그들에게 맞서 다시 싸움을 준비하며 숨을 골라야 한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마녀 반성폭력 활동가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너머n’ 아카이브(https://stopn.hani.co.kr/)에서 디지털성범죄를 끝장내기 위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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