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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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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고 취약한 여성에게 달려드는 상어들을 대적하며

어리고 취약한 여성에게 달려드는 상어들을 대적하며, 이민지의 경우
등록 2020-12-14 17:44 수정 2020-12-17 19:08
일러스트레이션 이다울

일러스트레이션 이다울

양극성장애(조울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하미나 작가는 지난 4년 간 한국 여성의 정신질환을 화두로 삼아 연구해왔다. 대학원에서 정신의학 역사를 공부하고 우울증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다. 2019년 10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이삼십 대 여자들의 우울증 이야기를 듣고 다니며 기록도 했다. 병원에서도 학계에서도 이들이 겪은 우울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의 일부를 공개한다.

2016년 5월17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공용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남자는 한 시간 이상 여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남성 6명이 들어왔다 나가고 들어온 여성을 흉기로 살해했다. 많은 사람이 이 여성혐오 살인을 ‘묻지마 범죄’라고 했다. 여성들은 “우연히 살아남았다.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여성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였고, 출구는 추모글이 적힌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이후 목소리를 내는 여성도, 직접 행동하는 여성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우울증을 앓는 여자가 늘 무기력하지만은 않다. 어떤 여자들은 오랜 시간 자기 자신을 향하던 분노의 방향을 바깥으로 틀었다.

항상 낡고 더러운 옷을 입고

친구이자 동료인 대학원생 이민지는 디지털성범죄 근절 운동을 하는 활동가다. 그에게 우울은 오래된 일이지만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건 반성폭력 활동을 하면서다. 3월 오랜만에 만난 그는 깜짝 놀랄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가수 구하라 죽었을 때 아침에 일어나면 두 시간씩 울었어. 죄책감이 많이 들었어. 씩씩했잖아. 공론화를 자기 힘으로 했잖아.” 구하라는 정준영 성폭력 피해자를 돕고 싶어서 기자한테 연락처를 물어보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정말 강인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의 삶을 개선하려는 사람이었어. 그 사람도 (반성폭력) 활동을 했던 거야. 그런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야.”

민지는 우울과 함께 불안 장애를 겪는다. 완벽주의. 결벽. 뭔가를 깜빡한 듯한 느낌. 사람들이 나를 해칠 것 같다는 불안. 증상은 청소년기에 가장 심했다. 눈을 감아도 잠이 들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밤을 새웠다. 늘 긴장해 있으니 살도 안 붙었다.

“우리 집이 가난했어. 차상위계층으로 청소년기와 성인 초기를 다 보냈으니까.” 보호자는 민지를 돌보지 않았다. 못했다. 어린 민지는 자신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몰랐다. 항상 낡고 더러운 옷을 입고 다녔다. 누가 빨래를 해주지도, 어떻게 빨래하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교육방송을 보거나 외가에서 책을 빌려 읽으며 스스로 교육했다.

집에서 교재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 교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교사용 문제집을 얻었다. “교사용 교재로 공부하면 모범답안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 그렇지만 어딘가 그 상황을 감당하는 게 무너지는 듯한 기분.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의 벽이 필요한데 한쪽에선 열심히 쌓고 있지만 다른 쪽에선 계속 무너지는 거야.”

대학교 2학년이 됐을 때는 집안이 더 심각하게 기울었다. 온 가족이 집에서 쫓겨날 처지였다. 갈 데가 없었다. 민지는 체념이 빨랐다. 학교 동아리방에서 살 수 있을지, 숙식과 빨래는 어디서 해결할지 궁리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는데 사람들이 카페에 있는 게 보였어. 나는 당장 지갑에 3천원이 있고 이게 전 재산이야. 저 사람들은 3천원보다 비싼 커피를 마셔. 나는 그 돈을 낼 수 없었어. 돈이 없어 세상에서 고립된 느낌. 그때 기억을 잊을 수 없어.”

내가 제일 미쳤어

당시 민지는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며 압도적인 충격과 함께 분노와 좌절감을 동시에 느꼈다. 포털 사이트에 20대 초반 여자 프로필로 로그인하니 ‘토킹바, 룸, 조건 만남’ 같은 성매매 아르바이트가 검색 결과 맨 위에 떴다. “여자인 이상 어떤 스펙이 있든, 어떤 신념을 가졌든 가난하면 성매매를 해야 한다. 이게 세상이 어린 여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 같았어.”

민지는 어려서부터 청소년기까지 겪은 일에서 회복하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어리고 가난한 여자애들한테 마음이 간다. “가난 때문에 성적으로 취약해지는 여자가 너무 많아. 가난해서 자기를 지키지 못했던 경험이 누적되면서 자존감도 낮고. 성매매 형태가 아니더라도 그루밍성범죄(상대방과 유대관계를 형성해 호감을 쌓은 뒤 저지르는 성범죄)에 더 취약하고, 착취적 관계를 맺는데 연애라고 생각해. 데이트폭력을 당하면서도 폭력인지 모르거나. 사회가 어리고 취약하고 가난해서 생존에 관한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여자한테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물어뜯으려고 달려오잖아. 이런 일을 겪는 여자가 너무 많아. 그런데 세상에는 팜파탈(악녀)이 이 남자 저 남자 돈 빨아먹는 서사만 널렸잖아. 가난한 여자가 온전히 자기를 지키면서 결국 어떻게 생존했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없어.”

민지는 디지털성범죄 근절 운동이 “속성상 사람을 망가뜨린다”고 했다. 여성 활동가는 계속 또래 여자들이 성폭행당하는 영상을 본다. “가해자가 보는 여자의 모습이 어떤지 알게 되잖아. 이른바 상업 포르노나 노출 수위 높은 영화에서 보이는 거랑 완전히 달라. 처음 느껴지는 건 성욕이 아니라 악의야. 이 여자의 인생을 조져버리겠다는 악의. 내가 여자애 인생 하나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전능감. 오로지 그것만이 느껴져.”

민지는 그런 상황에서도 빨리 감정을 수습하려고 애쓴다. 울고불고할 시간에 피해자를 빨리 지원하는 게 우선이다. 감정을 덜 느끼려고 노력하지만 정서적 마비가 오는 것도 같다. 하지만 각오는 확고하다. “이 활동을 하는 이상 평생 우울할 거야. 평생 화날 거고. 계속 주변 사람들 자살 이야기를 들을 거고. 나랑 같이 활동하던 가장 용감하고 똑똑하고 이타적인 여자들이 기력을 잃고 아픈 모습을 봐야 할 거고. 그걸 각오하기로 했어.” 민지는 하하하 웃었다. “난 두려움보다 분노가 훨씬 커. 이상한 대답일 수도 있는데, 내가 제일 미쳤다고 생각해. 가해자가 진짜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또라이여도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면 내가 이기리라는 무조건적인 확신이 있어.”

“여성 우울증 자살은 여성의 손을 빌린 타살”

우울과 절망의 경험을 민지는 쇠심줄 같은 멘털리티(사고방식)로 바꿔놓았다. 예전엔 무력하고 초라한 자신을 미워했지만, 이제는 약자인 자신이 아니라 부당한 권력과 시스템을 미워하고 항의하기로 했다. “피해자가 자살한 게 아니라, 사실은 그 여자의 손을 빌려 행해진 타살인 거야.”

범죄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에서 내담자들을 만나온 임민경 임상심리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타인과 연결되는 경험은 그 자체로 치유적인 힘이 있다. 경험을 공유하고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을 돕는 것은 가장 성숙한 방어기제인 승화나 이타주의와 관련 있는데, 근본적인 수준의 사회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깊다.”

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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