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었습니다. 11월27일 나온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은 과제로 채웠습니다. 이곳(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21/products/5242400774)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악마’는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온 범죄도 아니었다. ‘n번방’ ‘박사방’ 같은 디지털성범죄는 온라인 커뮤니티, 모바일 메신저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한 여성혐오가 ‘놀이’이자 ‘문화’가 되는 곳에서, 법·제도·교육의 빈자리를 파고들어 자연스레 튀어나온 한국 사회의 부산물이다. 물론 처벌 대상을 늘리고 형량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론 근절이 어렵다. 사각지대를 메우는 법과 제도 개정, 기술 발전과 이에 따른 윤리 문제 고민, 일상화한 여성혐오 문화의 변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웹하드 카르텔, 불법촬영부터 텔레그램 성착취까지 디지털성범죄를 쫓아온 전문가들은 이런 다각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야만 ‘예방’과 ‘근절’이란 목표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경찰의 위장·잠입 수사 합법화는 시급한 과제다. ‘텔레그램 성착취’의 경우 두 대학생으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의 잠입 취재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앞으론 ‘추적단 불꽃’ 같은 일반인이나 시민단체가 특정 대화방에 들어가 불법촬영물 유포를 고발하거나 신고하기 어렵다. 2020년 5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으로 불법촬영물을 시청하는 행위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대화방에서 주고받는 파일이 불법촬영물임을 인지하려면 이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불법촬영물을 시청하면 범법자가 된다.
더 큰 문제는, ‘위장수사’가 법제화되지 않은 현행법 체계에선 경찰 역시 불법행위를 해야 하는 처지라는 점이다. 최종상 경찰청 사이버수사과장은 “(성착취물 유포자들은) 요즘 (새로운 이용자가) 경찰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경찰을) 공범으로 만든다. 경찰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아동 성착취물 광고를 트위터에 직접 올리라고 지시하고 실제 이 광고글을 올린 화면을 갈무리해서 보내줘야 채팅방에 들어오게 하는 식인데, 이런 구조라면 경찰관이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성착취물 구매자를 수사하려면 경찰 스스로 판매자를 가장해야 하는데, 이 자체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보니 수사 과정에서부터 한계에 부닥친다는 설명이다.
위장수사를 통해 수집한 증거는, 현재로선 증거 수집의 위법성 논란이 야기될 우려가 있다. 법정에서 인정받지도 못한다. 최 과장은 “위장수사가 법제화되면 적법한 증거로서 법정에서 증거능력이 인정되고 수사관의 신변보호도 가능해진다. 이뿐 아니라 온라인상에 (합법적으로) 수사관들이 활동한다는 것이 알려지기 때문에 (유포자들을 위축시켜) 범죄 예방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사건을 인지한 뒤에야 신고를 기반으로 사후 조처를 하는 게 아니라 선제적인 대응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디지털성범죄 단속의 실효성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2020년 4월 ‘디지털성범죄 근절 대책’을 발표하면서 ‘잠입수사 활성화’ 방안을 밝혔고, 관련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기도 했지만, 아직 상임위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국외에선 위장수사에 대한 법적 근거가 이미 존재한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은 마약 범죄뿐 아니라 소아성애자를 검거하기 위해서도 미성년자로 가장해 채팅 사이트 등에 접속한 뒤 성구매자 등을 특정해낸다.
‘박사방’을 함께 운영했던 공범 ‘부따’ 강훈은 지인의 사진과 나체 사진을 합성한 이른바 ‘딥페이크’(실제 인물을 다른 화면과 합성·가공한 것) 사진을 제작하고 트위터 등에 유포한 혐의로도 기소됐다. 2020년 4월에는 국내외 개발자가 국외에 서버를 둔 한 사이트에서 여성 연예인 100여 명과 나체 영상 등을 합성한 딥페이크를 제작한 뒤 이를 유포한 것을 경찰이 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새 기술을 활용한 성범죄가 늘어나면서 이를 직접 다루는 사람들의 ‘기술윤리’ 문제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유향 국회입법조사처 연구관은 “인공지능(AI) 기술은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 때 쓰이지만, 동시에 딥페이크 영상을 식별하고 진위를 가려내는 데도 활용된다”며 “기술의 뿌리는 같다. 결국 이를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AI가 현실을 바탕으로 학습하기 때문에, 기울어진 권력 구조와 젠더 편향성을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아마존이 2014년부터 개발한 AI 채용 프로그램이 ‘여성’이란 단어만 들어가도 감점 요소로 분류해 논란이 되자 2018년 이를 폐기한 사례처럼 말이다. 결국 기술을 운용하는 사람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책임성을 강화하는 게 우선이다. 김 연구관은 “기술을 기반으로 디지털 공간의 법·제도·윤리 등을 논의하는 위원회에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들어가고 여성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유럽연합(EU)이 2019년 발표한 ‘AI 윤리 가이드라인’은 △인간에 의한 감독 △투명성 △다양성 △비차별성 △소수집단 보호 등을 핵심 요소로 꼽는다. 새로운 제도와 기구를 만들어 윤리적·사회적 책임을 부여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미국은 국립실종학대아동센터(NCMEC)가 따로 있다. 예컨대 트위터는 아동 성착취 이미지가 올라온 콘텐츠 링크가 식별되면 그 즉시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직접 해당 센터로 신고한다”며 “국내에서도 신고의무자제도를 활용해 플랫폼 사업자뿐만 아니라 앱 개발자나 프로그래머 등에게 적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한다”고 설명했다.
젠더 편향은 온라인 공간에도 존재한다. 이현숙 대표는 특히 “게임업계 내부 문화를 바꿔나가는 것이 법 개정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짚었다. 온라인게임에서 여성 캐릭터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일이 빈번하고 여성 게이머를 향한 성희롱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데, 이런 게임을 접하면 성희롱 등을 일종의 ‘놀이’로만 여기는 문화를 자연스레 습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딸을 키우는 이야기 구조로 인기를 끌었던 <프린세스 메이커2> 게임에는 원조교제를 제안하는 남성 캐릭터들이 나왔다. 또 ‘강간’이 게임 속 이벤트로 있는가 하면, 아르바이트 항목에 ‘매춘’이 추가된다. 게임 <오버워치>를 하는 여성 이용자들은 여성이란 이유로 음성채팅을 통해 쏟아지는 성희롱과 욕설 등을 견디다 못해 피해 상황을 각자 녹화해 유튜브 등에 공유하기도 했다.
최대한 현실과 가깝게 느껴지도록 증강현실(AR)이나 가상현실(VR)을 활용한 게임이 등장하면서 우려는 더 커졌다. 2017년 한 게임 성우는 화면 속 여성 캐릭터를 육성하는 가상현실 게임 <서머 레슨>을 하면서, 캐릭터의 속옷을 보기 위해 치마 아래로 몸을 숙이는 모습이 게임 방송에 그대로 송출됐다. 이용자가 현실에서 특정 장소에 방문해야 게임이 진행되는 증강현실 게임 <인그레스>에선 한 이용자가 같은 게임을 하는 여성을 보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뒤에서 껴안고 싶다”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됐다. 이처럼 자신의 동선이나 거주지가 게임 중에 타인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나자 게임을 중단하는 여성 게이머들도 생겨났다.
문제는 이런 문화가 게임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게이머들이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의 대형 커뮤니티를 통해 확산하고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2018년 여성 게임 성우나 일러스트레이터가 페미니즘에 관심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남성 게이머들의 집단 항의가 이어지고 게임회사가 이를 근거로 실제 계약을 해지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 대표 사례다.
여성 게이머 ‘딜루트’는 이러한 커뮤니티 문화에 대해 “익명 이용자로 구성된 길드(게임 속 모임)에선 여성과 관련한 모든 것에 대놓고 멸칭을 갖다붙이고 그것을 놀이문화로 삼는다” “(캐릭터의 성적 대상화 등에 대해) 누군가가 그 점을 지적하려 들면 커뮤니티에선 자정 노력조차 없이 ‘너만 깨끗한 척하냐’며 날을 세운다”고 밝혔다.
게임의 규제·자정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고민은 깊다. 김환민 게임개발자연대 대표는 “(게임 자체의 변화 없이) 게임 커뮤니티가 스스로 자정되길 기대하긴 어렵다. 다만 현재 게임물관리위원회에 시민들이 참여해 숙의할 수 있는 기구나 절차를 마련함으로써 두루뭉술한 규제 기준을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선적으로 게임 등급을 분류할 때 섹슈얼리티 논의가 더 구체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제언이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교단에 서는 게 부끄럽다”…‘나는 왜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나’
[영상] 박정훈 대령 “윤 격노는 사실…국방부 장관 전화 한 통에 엉망진창”
[속보] 우크라 공군 “러시아, 오늘 새벽 ICBM 발사”
음주운전·징계도 끄떡없던 강기훈 행정관, 결국 사의 표명
[속보] “우크라군, 러시아 ICBM 발사”
관저 ‘유령 건물’의 정체 [한겨레 그림판]
젤렌스키 “속도나 고도, ICBM 맞다”지만, 미국 언론들 “과장”
홍철호 사과에도 “무례한 기자” 파문 확산…“왕으로 모시란 발언”
“망할 것들, 권력 쥐었다고 못된 짓만” 연세대 교수 시국선언 [전문]
[단독] 대통령 관저 ‘유령 건물’…커져 가는 무상·대납 의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