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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빈 40년’ 선고 뒤 남성들의 ‘속죄 페미니즘’ 방담

조금 먼저 남성문화를 반성할 기회 얻은 남성들의 ‘속죄 페미니즘’ 방담
등록 2020-11-29 21:26 수정 2020-12-03 18:36
11월2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21> 회의실에 모여, 남성문화를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네 남성이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성평등 교육 활동가 이한, 만화가 이종범, 아빠 이종훈, 김완 <한겨레> 기자.

11월2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21> 회의실에 모여, 남성문화를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네 남성이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성평등 교육 활동가 이한, 만화가 이종범, 아빠 이종훈, 김완 <한겨레> 기자.


<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었습니다. 11월27일 나온 <한겨레21> 1340호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1년동안 일궈온 성과와 성찰, 그리고 여전히 남은 과제로 채웠습니다. 이곳(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21/products/5242400774)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염려돼요.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이종훈) “할 말을 생각해봤는데 모든 문장이 ‘고민입니다’로 끝나는 거예요.”(이종범)

자격을 염려하며, 고민스럽게. 네 남자가 둘러앉았다.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자리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와 나는 다르다고 선 긋거나, 반대로 대한민국 남성문화 속에 벌어진 일로 눙쳐 개별 사건의 잔혹성을 희석하는”(김완) 꼴이 될지 몰랐다. 그래도 계속 성찰하며 이야기하는 일을 “포기해선 안 됐다.”(이한) 용기를 냈다.

김완 <한겨레> 기자의 고민이 앞서 있었다. 2019년 11월 김완 기자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보도했다. 사건에 대해 쓰고 말하는 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성착취 사건을 낳은 남성문화라는 혐의에서 스스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익숙했던 내 주변 남성문화를 돌아보고 반성할 ‘어떤 계기’를 “운 좋게” 얻은 남성들과 대화하기로 했다.

38살 만화가 이종범. “운이 좋았어요. 대학에 입학해 총여학생회 밴드에서 드럼을 쳤는데 주변이 다 의식화한 누나들이었거든요. 젠더 감수성 제로인 상태로 들어갔을 거 아니에요? 누나들은 그런 나를 상대로 싸우지 않아요. 알려줘요. 그렇게 많은 걸 배웠어요.”

53살 두 아이 아빠 이종훈. “나는 운이 나빠 쉰 살 넘어서 페미니즘을 알았어요. 마을 운동회에서 사회를 보다가 아빠가 엄마를 구하는 게임에서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해주세요’라고 말했어요. 그 말이 ‘불편했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내가 그 말을 했다는 걸 인식조차 못했다는 걸 깨달았죠. 사과했어요.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대안학교 선생님이 아이들하고 페미니즘 공부하려고 하는데 아빠도 같이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주셔서, 아빠들을 모아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29살 성평등 교육 활동가 이한. “대학 때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친구들을 만났어요. ‘빻은 말’ 할 때마다 깨지면서 배웠어요. 페미니즘 앞에서는 깨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일깨워준 친구들이 고마워요. 나를 포기하지 않은 거잖아요.”

이들 앞에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놓였다. 혼란과 의문에 휩싸였다.

범죄와 비범죄 사이

이종범 “어떤 대화나 행동이 범죄 수준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한 번 인지적인 선이 그어지는 게 상식이잖아요. 범죄와 비범죄 사이에 선은 명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한테서 어느 순간 그 선이 파괴된 것인가? 그렇다면 그 기제는 무엇일까? 의문이 해소되지 않아서 사건 기사를 계속 찾아봤어요.”

범죄와 비범죄를 가르는 선은 어디서부터 흐려졌을까. 윤지선은 논문 ‘관음충의 발생학’에서 “불법촬영 범죄물들을 둘러싼 공유와 생산, 유희의 연대체가 결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대한민국 검·경찰의 무관심과 구조적 묵인… 남성 중심주의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연관성이 높다”고 적는다. 남성 중심의 제도·문화와 개인의 인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범죄조차 ‘그럴 수 있는 것’이 되어간다. 네 사람도 각자의 경험에서 비슷한 지점을 짚는다.

김완 “베트남 삼성전자를 취재했을 때 한국 공장이 들어오면 성매매 집결지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싸서 좋다’는 후기만 가득해요. 성매매는 불법인데, 대부분 내가 거기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집단적으로 죄의식이 없는 상태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서울 청량리에 살았는데, 중학생쯤 되면 그곳 성매매 지역을 한번 쓱 지나가보는 것이 마치 동네 아이들 의식 같은 것이었어요.”

이한 “성매매만 놓고 본다면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보다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높아졌어요. (성 구매 경험의 경우 20대는 6.9%로, 50대(44.4%)에 견줘 매우 낮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그런데도 사회 저변에 깔린 여성혐오, 강간 문화는 견고하구나. 또 다른 플랫폼에서 다른 방식으로 벌어졌구나, 하는 답답함을 느꼈어요.”

이종범 “그만큼 일상에 침투해 있어요. 기본 상태가 ‘죄의식 없음’이잖아요. 기본에서 떨어진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이종훈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기사 댓글에 ‘피해자가 돈 벌려고 한 것 아니냐’고 적혀 있었어요. 데이트폭력 사건에 대해서도 ‘대충 마음이 서로 있지 않았냐’고 하잖아요. 합의하지 않은 부분을 강제한 것은 폭력이고 범죄인데. 우리 사회가 유독 젠더 범죄에 대해서만은 ‘그것은 명백히 범죄’라고 말하지 않아온 것 같아요. 제대로 심판받는 범죄라는 경험이 우리한테 없어요. ‘남들도 그런데, 뭐. 우리 아버지도 권력자도 연예인도 그러고 지나갔는데, 뭐’가 되어버려요.”

남성이 페미니즘을 말한다는 것

공적인 제도와 일상 속 문화가 돌고 돌며 쌓아온 왜곡된 남성문화는 견고하다. 균열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한 “수평적인 친구 관계에서 여성혐오 발언이 나오면 ‘나는 불편하다’고 이야기해요. 군대 친구나 고등학교 친구 가운데 그렇게 안 보게 된 친구들이 있어요. 관계를 재조정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죠.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그래도 ‘불편하다’고 한마디라도 하는 게 제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수직적인 관계라면 어떨지 모르겠어요.”

이종범 “만약 업무 관련 미팅이라면…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죠.”

김완 “말하기 불편한 남성집단 속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면서, ‘나도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자괴감을 느낀 때도 있어요.”

그렇게 때로 혐오를 방관했으므로, 또는 저질렀으므로 페미니즘을 말할 때 스스로 검열한다. “군대에서든 대학에서든 여성혐오적인 행동을 했던 개인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불과 얼마 전에도 혐오를 저질렀을지 모를 내가”(이종범) 감히 페미니즘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속죄 페미니즘’의 틀이다. “(남성이) 페미니즘을 접한 이후, 더 크게 느껴지는 성별 권력 격차는 자신의 여성혐오적 역사와 함께 더 큰 죄책감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기 위해 발화뿐 아니라 활동 전반이 위축된다.”(이한, ‘남성 페미니스트를 찾아서’, 서울시NPO지원센터)

이종범 “페미니즘 시각에서 말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자기 검열을 해야 해요. ‘에듀케이티드’(교육)될 수 있다는 개념을 배제한 채 공격하고 맞받아 공격하는 분위기가 온라인에 있잖아요. 원죄조차 없어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자격을 늘 의식하게 돼요.”

이한 “남성이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여성 활동가의 마이크를 빼앗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요. 남성이라는 위치성을 잘 인지한 상태로 어떻게 말하고 운동할 수 있을까, 고민이에요.”

한 명이 있으면 바로 전파, 백신은 페미니즘

그래도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별 자격이 없고 성찰이 부족하다 해도, 나나 내 주변 사람들도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건 안 된다’ ‘범죄다’라고 이야기할 필요”(이종훈)를 더 절박하게 느낀다.

김완 “정신의학 전문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성혐오가 마치 전파력이 강한 바이러스 같다고 해요. 한 커뮤니티에 한 명, 그런 사람이 있을 때 확 전파되면서 문화로 자리잡는다는 거예요. ‘운 좋게 페미니즘을 배울 계기를 얻었다’고 말씀하셨지만, 대개 그런 계기를 극렬하게 거부하잖아요. 페미니즘 앞에서 더 과장된 남성연대를 과시하거나 페미니즘 목소리를 제압하려고 하거나.”

이한 “그래서 남성성을 고민하는 남성집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여성은 자기 삶의 궤적에서 페미니즘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데, 남성은 학문이나 타인의 경험을 거쳐서 배우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것을 도와줄 단체나 기관은 부족해요. 혐오를 퍼뜨리는 한 명을 일일이 찾기는 쉽지 않잖아요. 백신은 결국 페미니즘일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를 남성집단 안에서 한명 두명 말하기 시작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남성성은 이미 분화되고 있고,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20대 남성도 25.7% 정도로 나타나요.(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특히 ‘젊은 남성 사이에선 반페미니즘이 일반적’이라고 굳어진 것 같은 상황에서 적잖은 수예요. 단지 서로를 모르는 것일 수도 있어요.”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도 알게 된다면”(이종범) 좀더 빨리 왜곡된 남성문화에 균열을 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모두 가지고 있던 두려움을 말하고, 서로 알아채고, 공감하며 손잡은 여성 연대가 세상을 바꾼 것처럼.

“한 세대가 지나면 바뀐다”지만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믿음과 좌절, 희망과 절망은 시시각각 교차한다. 복잡한 마음이다. “전세계 모든 문화권이 진척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페미니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잖아요. 이런 분위기 속에 한 세대가 지나면 많은 게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요. 그런데 동시에 피해자가 당장 고통스러운 지금, 그 긴 시간을 생각하는 일에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요.”(이종범)

그래도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지난 1년 보았다. “성평등 강의를 하면서 2019년만 해도 불법촬영물을 보고 소지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말했어요. 이제는 형사처벌을 받는 ‘범죄’라고 더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여성들 힘으로 이만큼 온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 자리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다시 생각했어요.”(이한)

글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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