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노 땡큐] 격리의 시간, 우리 삶을 지켜준 것

웃을 수 있다면
등록 2020-05-11 13:53 수정 2020-05-23 05:25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코로나19로 전세계가 자발적 격리를 겪는 동안, 넷플릭스 가입자가 1577만 명 늘었다고 한다. 나도 그중 한 명이 되고야 말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넷플릭스가 미는 타이틀에 따라 사람들이 일제히 감상평을 올리는 풍경이 벌어졌다. 어린이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를 정신없이 봤다는 중년들의 고백이 이어지기도 했다.

빈민운동가 정일우 신부의 웃음

그런 영화들을 보는 데 지쳐갈 즈음 다큐멘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내 친구 정일우>다. 고 정일우 신부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영화다. 1935년생, 원래 이름은 존 데일리.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시골 청년은 예수회 신부가 되어, 1960년대 한국이라는 나라에 도착한다. 학교 안에서는 교수들이 수업하는 동안 거리에서 청년들이 민주화를 외치고, 도심이 개발되는 동안 가난한 이들은 별을 보며 잠들어야 하는 시대. 정일우 신부는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홀연 학교 밖으로 나가 청계천에 들어간다. 이후 그의 인생은 개발과 가난, 노동자와 빈민, 철거와 공동체 같은 묵직한 주제와 뒤엉켜 있다.

하지만 정일우 신부를 다룬 영화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정 신부가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는 사실이었다. 간밤에 철거당해 눈물을 쏟아내는 이들과 함께 분노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개구쟁이처럼 장난치고 노래를 불렀다. 수많은 고난에도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함께할 수 있었던 건, 그의 헌신만이 아니라 그의 웃음이 더 큰 역할을 했음을 영화를 보는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장례미사에서 ‘정일우 신부님이 천국에 못 갈 리 없으니, 남겨진 우리 불쌍한 예수회를 위해서나 기도해달라’는 말에 추도객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그가 어떤 힘을 주변 사람들에게 유산으로 남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영화를 만든 이는 1988년 일어났던 철거와 강제이주를 다룬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의 김동원 감독이다. ‘정일우 신부가 이 작품을 보면 뭐라고 했을까?’라는 질문에 김동원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재밌어요, 재밌어요. 그러면서 막 깔깔대고 웃을 것 같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냐고 신경림 시인이 썼다면, 정일우 신부처럼 고통 속에도 웃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 있다. 만약 성인의 삶에 고통과 인내만 있다면, 누가 그 성인의 삶을 본받으려 할까? 만약 세상을 바꾸는 일이 인생의 모든 기쁨을 다 저버리는 일이라면, 누가 그 길에 함께하려고 할까? 웃음이 가득한 이들이 두려움에 맞서고, 기쁨을 아는 이들이 모두를 감싸안는다.

격리의 시간, 우리 삶을 지켜준 것

영화를 보기 전날 칠레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코로나19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부독재를 피해 망명 생활을 했던 세풀베다는 아마존 밀림 파괴, 정치 탄압으로 인한 실종자들을 다루면서도, 탁월한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아마 그가 자신을 쓰러뜨린 감염병의 시대를 그린다면, 인류가 이제껏 겪지 못했던 고통을 그리는 중에도 사람들이 보여준 웃음의 장면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자가격리 중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일만 허용되자 그 짧은 외출에 온갖 멋을 부리고, 각자 발코니에 나와 이웃과 수다를 떠는 풍경을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격리의 시간이 끝나가는 듯하다. 그렇다고 망가진 삶을 회복하는 게 쉽지는 않다. 어쩌면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결국 우리 삶을 방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잊지 않기를 바란다.

김보경 출판인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