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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이란 몹쓸 노릇

‘균형’을 잡지 못해 깨진 관계들
등록 2019-04-18 11:00 수정 2020-05-03 04:29
교정을 걷고 있는 학생들. 한겨레 김성광 기자

교정을 걷고 있는 학생들. 한겨레 김성광 기자

그 언니를 만나면 내가 주로 돈을 썼다. 꼭 형편과 벌이 때문은 아니다. 내가 그냥 손이 더 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본전’ 생각이 났다. 내가 돈 쓰는 것을 언니가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인상을 받으면서다. 잘 먹었다, 고맙다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해야 할 게 아닌가. 만나자고 하면서 왜 어디서 보자거나 무엇을 하자는 의견조차 내지 않을까, 돈을 안 쓰면 마음이나 기운이라도 써야 할 게 아닌가, 급기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찍 정신을 차렸다면 ‘관계의 균형’을 잡는 데, 정확히는 ‘씀씀이의 균형’을 잡는 데 신경 썼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다. 오지랖이랄까 잘난 척이랄까 어떤 습관에 나도 갇혀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언니가 정해봐.” “밥값은 나눠 낼까?” 이 소리 한 번을 못했다. 대신 속 좁게도 마음속 ‘치부책’에 기록해왔다. 유심히 보니 언니는 돈을 못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꽤 잘 쓰고 다녔다. 자신에게는 더 썼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를 좋아한 게 아니라 나와 만나 누리는 것을 좋아한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사반세기 넘게 사귀어오던 우리는 현재 ‘졸연’ 했다.

간간이 언니가 다른 모임에서 어울리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발 떨어지니 언니의 어떤 ‘결핍’과 ‘어리광’이 선명하게 보인다. 언니는 엄마가 자기에게 기댄다고 늘 힘들어했다. 그러면서 본인도 다른 사람에게 늘 그런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고 싶어 하고 타인에게 쉽게 기대어 자기를 지탱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랄까. 내 마음속 언니는 한마디로 ‘지겨운 공주’다.

반면 이런 친구도 있었다. 섭섭하거나 화나면 자기중심적으로 대놓고 터뜨린다. 나는 종종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와, 얘한테 맞추다가는 나를 잃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한번은 전화로 큰소리 내며 다퉜다. 친구는 친구대로 내 행동을 제 마음속 ‘치부책’에 써놓고 있었다. 누구 흉본 얘기, 약속 장소에 번번이 늦은 얘기, 제 일과 관련해 타인에게 아는 척한 얘기 등등 고구마 뽑듯 줄줄이 나왔다. 나도 질세라 퍼부었다. 누구 흉본 건 너랑 더 친하다고 여겨서고, 약속은 급하게 너 가까운 곳을 잡다보니 그런 것이며, 그 ‘타인’이 네가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상대라 지금 눈이 뒤집혀 오버하는 거라고. 굵고 짧게 뜨거웠던 우리는 오랜 세월 ‘휴연’ 중이다.

앞의 언니와 달리 좀더 철이 든 뒤 만난 이 친구는 내가 비교적 ‘정확하게’ 좋아했다. 내 마음의 크기를 가늠하고 상대의 한계도 헤아려가며 만났다. 그래서인지 후회도 미련도 없다. 상대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멋진 쌍년’이다.

묵은 관계라도, 설사 피붙이라도, 일방의 억울한 마음이 들 때는 마냥 누를 게 아니다. 방법이 무엇이든 꺼내 보일 필요가 있다. 책임이랄까 용기이다. 예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앞의 언니와 그러지 못했다. 기실 상대는 나의 어떤 ‘승한’ 기질에 그냥 편승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내가 언니를 길들인 건지 언니가 나를 길들인 건지. 돌아보니 내가 왜 언니를 좋아했는지조차 헛갈린다. 찜찜함과 아쉬움이 남는다. 혼자 넘치고 혼자 삭이다 혼자 질려버린 나 자신에 대한 민망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관계에서 불만을 쌓아만 두는 건 정말 바보짓이다. 그나마 그냥 견디거나 내버려두지 않은 게 위안이다. 좋은 게 좋은 건 없다. 언니와 인연을 졸업하면서 비로소 ‘어른의 관계’에 들어선 기분이다.

익숙함이란 때론 관계에서 몹쓸 노릇을 하기도 한다. 정겹고 편안하다 해서 게으르거나 무책임해도 되는 건 아니다. 돈이든 마음이든 계산하듯이 주고받을 건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치우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확하게’ 좋은 사람일 필요가 있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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