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눈에 띄게 달라지는 명사십리 건설현장을 돌아보니 머지않아 인파십리로 변할 그날이 벌써 보이는 것만 같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아름다운 우리나라 동해 기슭에서 문명하고 행복한 휴식의 한때를 보낼 인민들의 밝은 모습을 상상해보느라면 힘이 나고 기쁨을 금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은 11월1일치에서 강원도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현장을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김 위원장의 갈마지구 방문은 올해 들어서만 벌써 세 번째다. 김 위원장은 지난 5월26일과 8월17일에도 현지를 찾아 공사를 독려한 바 있다.
미국 향한 불만 드러내는 김정은김 위원장은 원산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여름철)과 마식령 스키장(겨울철)을 묶어 세계적인 관광단지로 키워나가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국면이 이어지는 한 실현 불가능한 꿈이다. 김 위원장이 이번 원산 방문에서 “적대세력이 우리 인민의 복리 증진과 발전을 가로막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굴복시켜보려고 악랄한 제재 책동에 어리석게 광분”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미국을 향한 ‘갑갑증’이 느껴진다.
“지금 온 나라 전체 인민은 역사적인 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제시된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받들고 승리의 신심 드높이 혁명적인 총공세, 경제건설 대진군을 힘차게 벌여나가고 있다.”
은 10월29일치에 ‘당의 새로운 전략적 노선 관철에 나서는 중요한 요구’란 제목의 논평을 실었다. 남북 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둔 지난 4월20일 열린 제7기 3차 전원회의는 북한판 ‘개혁·개방 선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회의에서 핵과 경제를 동시에 개발하겠다는 이른바 ‘병진노선’의 완성(폐기)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핵을 안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점을 공식 인정한 셈이다. 신문은 논평에서 김 위원장의 말을 따 “이번에 제시한 새로운 전략적 노선의 기본 사상은 우리의 경제 토대를 강화하고 경제를 활성화하는것”이라고 전했다.
논평을 쓴 이는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후보원사 교수 박사 리기성’이다. 북한은 박사급 이상 가운데 학문적 공헌이 큰 학자에게 후보원사·원사 등의 명예칭호를 부여한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리기성은 북한 정치경제 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며 “그의 이름으로 이 시점에 논평을 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실제 리기성은 대외적으로 북한의 경제정책과 현황을 설명하는 ‘마이크’ 역할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일본·미국 등의 주요 외신이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그를 인터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북한 경제와 관련된 국제회의에도 단골로 참석해왔다.
‘스위스·싱가포르’ 모델 거론도리기성은 논평에서 “현 시기 경제관리 방식과 체계를 개선·완비하는 데서 중요한 것은, 경제건설을 강력히 추동할 수 있게 국가기구 체계와 사업 체계를 합리적으로 정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우리식 경제관리 방법을 확립하는 데서 나서는 기본 요구는, 생산과 관리를 객관적 경제법칙과 현대 과학기술의 요구에 맞게 하여 최대한의 실리를 얻는 것”이라며 “기업체들이 부여된 경영 권한을 활용하여 경영관리를 개선할 수 있게 경제적·법률적 조건과 환경을 합리적으로 보장하고 개선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제7기 3차 전원회의 결정 이행 방안을 제시하는 한편, 경제개발이 본격화할 ‘제재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에 논평이 실리던 날, <ap>은 평양발로 리기성과 한 인터뷰를 내보냈다. 미리 시점을 맞춰, 나라 안팎에 같은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 예사롭지 않다. 리기성은 먼저 ‘대북제재 무용론’부터 꺼냈다. 대북제재가 강화돼왔음에도, 북한 경제가 성장을 지속해왔다는 주장이다. 그는 북한 국내총생산(GDP)이 2013년 249억9800만달러에서 2017년엔 307억400만달러로 늘어났다는 수치도 제시했다. 또 수입 원유로 생산하던 비료를 북한산 석탄을 이용해 생산하는 등 제재로 인해 특정 부분의 경제활동은 오히려 효율성과 자생력이 높아졌다고도 주장했다.
논평에서 ‘정보기술, 나노기술, 생물공학’ 등을 언급하며 “첨단기술 산업을 기둥으로 하는 새 세기 경제구조를 확립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던 리기성은 <ap> 인터뷰에선 ‘스위스·싱가포르’ 모델을 거론했다. 두 나라 모두 자원은 적고 영토도 넓지 않지만,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살려 경제를 개발시켰다는 점에 주목한 게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한반도는 지리적 이점이 크다. 앞으로 이웃 나라들과 협력해 교통산업을 육성할 것이다. 만약 남쪽의 철도를 시베리아까지 연결할 수 있다면, 많은 나라가 해상 운송로 대신 우리의 철도를 택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 제안한 ‘동북아 철도 공동체’와 똑같은 주장을 리기성이 인터뷰에서 강조한 것은 흥미롭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가입 문제도 언급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북한이 국제통화기금 등 다양한 국제 금융기구에 가입해 개혁·개방에 나설 뜻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리기성은 1990년대 북한의 아시아개발은행(ADB) 가입 노력이 좌절됐던 경험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제사회의) 제재와 미국과 일본 같은 적대국가의 움직임 때문에 국제 금융기구에 가입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아시아개발은행 같은) 지역 금융기구에도 가입하지 못한다면, 국제 금융기구 가입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북-미 관계’를 약속했던 미국이 멈칫한 새, 북한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음을 새삼 강조했다.
미 중간선거 뒤 북-미 고위급회담 재개
다행히 북-미 협상이 곧 재개된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10월31일(현지시각) 제2차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북-미 고위급회담이 미국 중간선거(11월6일) 직후 열린다고 밝혔다. 10월7일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 때 합의한 2차 정상회담 개최 준비가 한 달 만에야 본격화하는 셈이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남북관계와 달리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던 북-미 협상이 이번엔 본궤도에 오를 수 있을까. 남과 북은 지난 9월 합의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11월1일 0시부터 땅과 바다, 하늘에서 모든 적대행위를 멈췄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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