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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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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보다 차라리 방석집

창 하나 없는 술 먹는 공간 방석집 vs 나르시스적 위대함을 구매하고 전시하는 공간 피트니스클럽
등록 2015-07-24 08:23 수정 2020-05-02 19:28

서울 아현동 고가도로가 철거됐다. 아현동 고가도로는 한때 자동차 쌩쌩 달리는 근대 서울의 상징이었다가 근방의 개발을 더디게 하고 수선·유지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드는 애물단지로 취급받다가 철거됐다. 고가도로가 철거되자 고가도로 아래에 가려져 있던 단층 건물들이 쉽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확확 변하지 않았던 탓에 아직도 남아 있는 건물에는 가구 상가도 많이 있지만, 다른 편에는 ‘장미’나 ‘순정’ 같은 가게 이름 아래 맥주·양주 딱 두 단어만 적혀 있는 아현동 ‘방석집’들도 있다. 술 취한 사내들이 좁은 밀실에 방석을 깔고 앉아 궤짝째 술을 마신다고 해서 붙은 속칭이다. 늦은 밤에 아가씨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창 없이 단단한 벽 뒤로 은밀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방’을 좋아한다. 방석집과 모텔의 방과 노래방·비디오방 등이 모여 있는 거리. 한겨레

한국인들은 ‘방’을 좋아한다. 방석집과 모텔의 방과 노래방·비디오방 등이 모여 있는 거리. 한겨레

노골적으로 은밀하고 직설적으로 퇴행적

아현동처럼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내가 사는 서울 강북의 동네에도 ‘샤넬’ ‘에너지’ ‘팝콘’ ‘쎄시봉’ 등의 이름을 단 방석집들이 있다. 상권이 들썩이는 동네라 방석집의 불법 영업에 대한 민원이 쏟아진다. 민원이 속출하면 구청 직원들은 한밤에 “불법 영업소 이용 근절하자”고 쓰인 피켓을 들고 방석집 거리 앞을 10m 간격으로 지키고 선다. 한밤중에 다니는 사람 없이 조용한 2차선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야간 근무 중인 구청 직원들을 보는 것은 참 기이한 일이다.

가게들은 거의 반쯤 문을 닫은 상태다. 몰래몰래 옛날 단골손님을 받으며 가끔 영업을 한다. 지방의 작은 읍내에 더 많이 남아 있는 퇴락한 유흥업소의 유형이다. ‘샤넬’ ‘미로’ 등의 이름만 보아도 그렇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숱한 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 상호의 낯선 어감을 부르고 읽는 일에 익숙하다. ‘샤넬’이라는 가게 이름이 제안하는 직설적인 판타지에 솔깃한 사람이면 이미 너무 순진한 사람이다. ‘최신’을 팔아 장사를 하지 않는 방석집은 행인이나 손님의 시선과 밀당할 생각이 없다. 이름, 이름을 적은 간판의 색상, 디자인 모두 노골적으로 은밀하고, 직설적으로 퇴행적이다. 가게 벽은 창 하나 없이 단단하고 투박하다. 낮 동안 철제문이나 두꺼운 빛깔의 유리문 역시 굳게 닫혀 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은밀한 장소고, 안으로 닫힌 세계다.

은밀함은 흔히 음란함을 예비한다.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에서 제일 편리한 시설이라고 말하는 ‘모텔’과 같은 곳도 그렇다. 네온이 번쩍이는 외관 아래 ‘벨라지오’ 같은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고급 호텔 이름을 패기 있게 가져다 쓰는 모텔은 방석집과 비할 수 없이 화려하지만, ‘순정’이나 ‘에너지’와 그리 다르지 않은 노골적인 판타지를 제안한다는 점에서는 방석집과 다를 바 없다. 특히 이용자들의 사생활 보호라는 명목으로 주차장 입구나 객실 방 창에 설치된 두꺼운 장막은 모텔의 폐쇄성을 한층 더 강화했다.

전국 곳곳에 모텔이 들어서며 이용 양태도 많이 변했다. 월풀 욕실, 2인용 컴퓨터, 대형 IPTV 등 젊은 층이 즐겨 사용하는 모텔 체인 사이트에는 바깥을 내다볼 필요 없는 모텔 방의 편의 시설에 대한 평가가 가득하다. 평가 글들은 반나절 머무르며 즐길 거리가 가득한 모텔 정보를 전한다. 바깥에서 들여다볼 수 없도록 가리고 막아둔 창문 안쪽의 내밀함은 이제 거의 바깥에 대한 무관심으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한국인들이 유독 ‘방’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 않다. 노래방과 비디오방을 시초로 별의별 ‘방’이 다 생겼다. 꼭 방석집이나 모텔처럼 남에게 나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기 싫은 곳에서만 ‘방’이 증식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유수의 세계 식당들은 꼭 경관이 유려한 곳에 있지 않아도 나름의 ‘전망’을 제안한다. 별다른 풍광이 없는 동네 한복판에 있어도 테라스 자리가 언제나 구석 자리보다 먼저 찬다.

필요한 건 창이 아니라 호출벨

반면 남산타워 꼭대기쯤이나 바닷가 절벽 옆에 자리한 식당이 아니라면 한국의 식당들은 전망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안락하고 은밀한 별실에서 최고의 서비스로 모신다고 선전하는 일이 많다. 방과 방 사이에 가벽을 설치해 만든 별실에 꼭 필요한 것은 밖을 내다볼 창이 아니라 직원을 호출할 차임벨이다. 우리는 안으로 닫힌 공간에서 일어설 필요 없이, 문을 열 필요 없이 계속 벨을 누른다. 별실이 없는 곳에도 칸막이가 설치된 고급 식당이 적지 않다. 닫힌 공간의 은밀한 안락함을 선호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왜 창이 없는 곳에서 구태여 안락함을 느끼는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끼리’- 직장 동료, 가족, 동창, 조직 등- 나누고 상의할 일이 많아서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아닌 사람들의 관심과 참견을 거부하기 때문일 것이고, ‘우리’가 아닌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죄다 소음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은밀함에 대한 욕망은 때로 음란한 상상과 관련되고, 때로 음흉한 작당을 위한 요건이며, 나와 우리 사이를 단호하게 가르려는 방어적인 태도의 소산이다. 가령 한강 둔치 잔디밭을 점령한 뛰어난 성능을 가졌음이 틀림없는 텐트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얼마 없는 시야 트인 공간에 온 사람들이 저마다 텐트를 설치하고, 잔디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사이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누웠다.

특수 재질로 만들어진 텐트천은 틀림없이 시원한 강바람을 쐬러 온 사람들을 여름철 살인 진드기에서 보호할 것이다. 텐트 속으로 강바람이야 흘러들어오겠지만, 텐트 속에 누워 피로를 이겨낼 수도 있겠지만, 텐트 속 사람들에게 밖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방이 필요하다지만,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다시 안락함을 주는 칸막이 쳐진 공간에 머무르려는 모습은 어색하다. 구태여 모르는 이들에게 말을 청하고, 물건을 빌리거나 빌려주지 않더라도, 문자 그대로 열린 공간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이들은 나와 같지 않은, 내 눈에 조금 낯선 다른 이들의 모습을 보고 듣는다. 칸막이 친 공간은 우리에게 이런 우연한 감각의 교차를 계속 박탈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물론 은밀함의 공간이 무조건적 배제, 궁극적 차별의 공간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보여주기의 공간이 무조건 자유의 생산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일방적인 보기와 보여주기의 공간 역시 나르시시즘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은밀한 공간이 가득했던 동네에 새로 생긴 피트니스클럽을 볼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안면을 텄던 젊은 동네 카페 주인은 동네에 시끌벅적한 시장도 있지만,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2차선 도로에 옛날 읍내 분위기가 남아 있어 정이 간다고 했다. 길가에 찍은 사진을 잔뜩 진열해놓은 사진관, 일본식 선술집(이자카야)과 비교할 바 없이 추레한 옛적 호프집과 꼬치구이집, 문방구, 치킨집이 있고, 그 사이사이 방석집이 있었다. 그 위로 교회와 학원이 또 이상하게 나란히 있었다. 그 사이 유명한 건설회사가 지은 높다란 타워가 지하철역 출구 옆에 몇 동이나 들어섰다. 골목마다 낡은 원룸이나 연립건물을 부수고 새로 지은 4∼5층짜리 빌라가 즐비하다. 새로 입주한 젊거나 중산계급 이상의 주민들의 민원으로 동네 방석집은 거의 다 문을 닫았다.

건물 아래의 사람들은 불이 밝게 켜진 피트니스센터에 눈을 두게 마련이다. 러닝머신을 달리는 사람들은 영상을 시청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건물 아래의 사람들은 불이 밝게 켜진 피트니스센터에 눈을 두게 마련이다. 러닝머신을 달리는 사람들은 영상을 시청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신호등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곳

그 자리에 새로 ‘힙’하다는 감각의 바가 들어선다. 동네 이곳저곳에 패셔너블한 자전거 부품 매장, 동물병원, 피트니스클럽이 들어선다. 주택을 개조한 중국집 앞에서 흰 셔츠를 입은 중년 사내 몇이 회식 중간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들은 날이 어두워져 불을 환히 밝힌 옆 건물 1층 가게 안을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작은 카페 크기의 체력관리실에서 젊은 남성이 어깨 근력을 키우는 기구를 열심히 끌어당기고 있다. 의도적인 환한 조명 탓에 남성의 근육과 땀방울까지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인다. 뒤쪽에서 좀더 얌전한 여성이 목을 축이는 중이다. 전면 창 바로 옆에서 타이트한 유니폼을 입은 여성이 서류를 들여다본다. 주르륵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내들은 이 모든 것이 한껏 신기하다. 높다란 타워 옆 좀더 단단한 건물 6층에 들어선 피트니스클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표정을 짓는다.

8차선 도로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건너편 건물 6층, 창 바로 앞에 설치해놓은 러닝머신 위로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들을 올려다본다. 밖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헬스클럽이 생긴 지는 꽤 되었다. 그사이 헬스클럽은 피트니스클럽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유리창은 더 커졌으며, 실내 조명은 더욱 밝아졌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회식 자리에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음식을 먹고 귀가하는 사람들은 불 켜진 피트니스클럽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이들을 보며 자기관리에 실패했다는 자괴감을 느낀다.

환한 불빛과 보고 보이는 배치, 이곳에는 은밀함이 없다. 그러나 이곳에도 시선의 교환과 교감은 없다. 열심히 러닝머신 위에서 열량을 태우는 사람들은 퇴근길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보다 자기만의 영상을 시청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자기 몸을 가눌 때 인간이 느끼는 당연한 쾌감 이외에도, 자기관리에 성공한 사람의 희열을 함께 느끼며, 이들은 고객을 유인하는 피트니스클럽의 자발적인 광고 모델이 된다. 자신의 몸, 외모와 체력이 모두 자산이 되는 시대에 피트니스클럽은 소시민이 자기 자신을 통제했다는 나르시스적 위대함을 구매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앞만 보고 달려가자는 ‘칸막이’

카페에 앉아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칸막이가 설치된 도서관이나 독서실이 불편해서 카페를 찾는다고 한다. 아직도 칸막이가 제일 많이 남아 있는 곳 중 하나가 독서실이나 독서실과 다름없는 분위기의 도서관이다. 칸막이 쳐진 책상 앞에 앉은 젊은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연정이나 욕정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연정이나 욕정을 지우기 위해 그 자리에 앉는다. 바깥을 보지 말고, 정신 집중,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는 일이 태반인 사회에서 칸막이는 유용하다. 칸막이 안에 홀로 고립된 ‘나’, 가끔은 방석집보다 끝없이 칸막이만 재생산하는 도서관, 도서관의 삶을 강요하는 사회가 더 유해할지도 모른다.

이나라 이미지문화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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