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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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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자유, 그곳에 반달의 흔적

‘세월호 1주기’ 광장의 경찰차벽은 말과 행진을 가로막겠다는 시각적 이미지… 비극적 사건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추모를 폭력집회로 몰고 ‘문화 파괴’ 반달리즘 비판으로 제압하려 하고
등록 2015-05-07 20:31 수정 2020-05-03 04:28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등 세계 유수의 도시에는 늘 반달의 흔적이 있다. 지난 4월 서울 시내에도 반달의 흔적이 나타나 서울경찰청이 이를 엄벌에 처한다고 공포했다고 한다. 물론 가슴에 작은 무늬를 가진 반달곰이나 밤하늘의 반달 이야기가 아니다. 로마제국이 몰락하던 시기 제국의 수도를 약탈했다고 알려진 게르만 반달족의 이야기다. 반달족에서 이름을 딴 반달리즘이란 말은 특히 18세기 말 프랑스대혁명 시기, 공화국 군대가 호사스런 교회 건물, 조각상, 절대왕정이 남긴 왕궁 등 구체제의 상징물을 파손하는 행위를 가리켰다. 기독교 교단과 신자들의 우상파괴, 오늘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타 문화 문화재 파괴 역시 반달리즘의 전형으로 꼽힌다. 이 말은 이후 문화재나 예술품 이외의 공공 기물에 대한 개인이나 집단의 의도적이거나 무지에서 비롯된 훼손, 화풀이 공격까지 통틀어 지칭하게 되었다. 반달리즘은 어쨌거나 주로 익명의 군중이 모여들고, 공공장소를 공유하는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가치와 사물에 대한 공격이다. 지난 4월19일 서울의 경찰은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에 의해 유리창이 훼손되고 스프레이 낙서 세례를 받은 경찰차량의 사진을 현장의 폭력성의 증거로 공개했다. 경찰은 그로부터 쉼없이 불법 폭력집회를 규탄한다.

지난 4월19일,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고립시킨 서울 광화문 일대에 세워진 차벽에 항의해 시민들이 경찰차에 구호를 썼다. 이것은 무질서의 상징이 아니라 시민적 저항의 한 형태였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지난 4월19일,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고립시킨 서울 광화문 일대에 세워진 차벽에 항의해 시민들이 경찰차에 구호를 썼다. 이것은 무질서의 상징이 아니라 시민적 저항의 한 형태였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서울과 도쿄의 준법 풍경, 자동판매기

광화문이 얼마나 폭력으로 신음했는지 호소하는 경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서울의 준법 풍경을 묘사하던 파리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일본 도쿄와 서울을 모두 방문했던 이 친구는 도쿄와 서울의 인상적인 풍경으로 여기저기 보이는 자동판매기를 꼽았다. 친구는 별의별 것을 다 파는 일본 자동판매기에 비할 바 아니지만 한국 지하철역이나 노상에서도 적지 않은 자동판매기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자동판매기들이 가끔 방치되어 먼지로 뒤덮여 있을지언정 찌그러진 모퉁이 하나 없이 멀쩡하단다. 프랑스 노상에 자동판매기를 설치하는 일은 일상적인 반달리즘의 우려 탓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노상의 자동판매기가 한국 거리의 대단한 치안 상태와 한국 시민의 대단한 시민의식의 상징이 돼버렸다.

파리 일부 지하철역 지하 승강장에 드물게 있는 음료 자동판매기 대다수는 동전 투입구와 상품 꺼내는 곳을 제외하면 흡사 요새와 같은 철망 등에 꼭꼭 감싸여 있다. 자동판매기뿐이 아니다. 마르세유나 파리 근방 생드니시처럼 치안 상태가 좋지 않은 곳뿐 아니라 관광객이 적지 않은 파리 시내 한복판 레알 지구 같은 곳에서도 깨진 광고판이나 부서진 전화박스, 낙서가 휘갈겨진 표지판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자동차마다 블랙박스가 설치되고 동네 곳곳, 대형 상점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기 전에도 한국이나 일본의 거리는 반달리즘으로 몸살을 앓았던 뉴욕이나 파리 등의 거리와 비할 바 없이 ‘온전’했다. 물론 이를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시민보다 길거리의 교통신호를 어기는 보행자나 낙서하는 시민,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준법의식’이 결여된 시민이 더 규탄받는 사회에서 공공 기물을 훼손하는 반달리즘이 드문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낭만의 도시를 꿈꾸고 도착한 일본인들 중 일부가 ‘일상적 준법정신’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일본 도시와 비교할 바 없이 지저분한 도로, 일부 파손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공공 기물, 큼직하고 과시적인 그라피티(낙서)로 덮인 거리 벽면 등을 목격하고 치료를 요할 만큼 큰 심리적 충격을 받는다는 이야기(‘파리 신드롬’)는 프랑스에서도 유명하다.

“법을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명령

한국인의 준법정신을 증명한 사건 중 하나는 2002년 거리 응원전이다. 언론은 수백만 명이 거리에 나와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지만 이후에 쓰레기 하나 남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2002년 거리의 열광, ‘문화시민’ ‘준법의식’의 경험은 동시적이었다. 이후 한국은 어떤 열광도 준법정신의 강요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고 다짐하는 듯하다. 광우병 관련 집회나 지난 세월호 관련 집회에서 반달리즘이 발생하면 보수언론과 대중은 정치적 열망과 준법정신을 조화시키지 못한다고 비난을 가한다. 그러나 서구 여러 나라, 적어도 영국이나 프랑스의 집회 현장, 스타디움, 공연장 등 많은 수의 흥분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발생하는 반달리즘의 사례와 견주어보면 한국의 정치적이거나 문화적인 흥분은 여전히 “법을 지켜야 한다”는 강력한 명령에 굴복하는 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앞의 나라에서 일어나듯 흥분한 시위대 중 일부(‘브레이커’)가 집회의 목적과 상관없이 거리의 민간인 차량을 훼손하거나 상가 유리창을 깨는 일이 일어났던가. 스프레이 낙서가 주변 상가와 주거지의 벽과 유리창을 뒤덮었던 적이 있는가.

이집트를 탈출하는 유대인들의 행렬을 가로막았던 홍해 바다는 이들을 이끄는 모세의 기도로 갈라졌다. 지도자는 행렬을 위해 길을 만들었다. 모세의 출애굽기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은 간구하는 자에 대한 하늘의 응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각적 이미지가 되었다. 지난 4월18일, 세월호 1주기 관련 집회가 열린 광화문 광장과 종로 일대에서 20세기 내내 자동 엔진 없는 사람을 비웃으며 사람보다 빨리 달리던 자동차, 탄소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온갖 규제를 만들어도 틈만 나면 달리던 자동차 수백 대가 엔진을 껐다. 경찰관을 운송할 경찰버스였다. 버스들이 엔진을 끄고 촘촘히 자리를 잡았다. 사회의 꼭대기 누구인가가 세월호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는 시민, 비극적 사건을 애도하는 시민, 국가의 부재에 항의하는 시민이 행진하는 일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광장의 시민들을 향해 쏘아대던 물대포

이 행진이 ‘누구에게’ 위험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위험을 통제하는 일은 긴급히 다루어졌다. 광화문 거리에 빽빽하게 들어찬 경찰차벽은 따라서 간구하는 자의 말이 시끄럽고 성가시다는 응답이었고, 말과 행진을 가로막겠다는 의지의 시각적 이미지였다. 벽을 사이에 두고 행진을 시도했던 시민, 유가족을 향해 달려가던 시민과 경찰이 대치했다. 바람이 강하게 불던 밤, 물대포가 차벽 봉쇄에 항의하는 시민들을 향해 쏘아대던 물줄기는 얼음물처럼 차고 송곳처럼 날카로웠다고 한다. 차벽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하며 때로 차벽을 밀어보려 애쓰던 시민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 준법정신을 달달 외도록 교육받았으며, 무장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이들이다. 도로는 손상되지 않았다. 누구도 집어던질 돌을 만들기 위해 도로를 깨지 않았다. 몇몇에게 래커 스프레이가 있었다. 돌멩이 대신 래커 스프레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이들은 차벽 위에, 세종로의 공공기관 벽이 아니라 차벽 위에,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봉사하겠다는 미소를 짓고 있는 경찰의 이미지가 그려진 경찰버스 위에, 자신들에게 어쨌거나 길을 터주지 않는 차벽에 “정부 파산” “박근혜 나와” 같은 구호를 적었다. 어떤 이는 사진 속 경찰의 웃는 얼굴 눈매에 붉은 선을 그려넣었다. 노란 배를 매단 이도 있다.

다음날 경찰청은 경찰이 입은 ‘엄청난’ 피해를 강조하며 문제의 사진을 폭력의 증거로 공개했다. 경찰은 정말 스프레이가 공권력을 파괴하고 도시 공간을 무질서로 모는 가장 위험한 무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래커 스프레이를 누구인가의 얼굴에 뿌린다면 공권력이 사람들의 얼굴에 뿌렸던 기록적인 양의 캡사이신이나 물대포의 물줄기보다 분명 ‘더’ 위험할 테다. 그렇지만 누가 경찰의 몸이나 얼굴에 래커 스프레이를 뿌렸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경찰이 시위대의 불법성과 폭력성의 증거로 인용한 경찰버스 사진을 보고 어떤 이들은 몹쓸 파손 행위가 경건한 추모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음날 한 신문이 태극기가 인쇄된 종이를 태우는 모습을 1면에 게재한 뒤에는 4월18일 현장에 있던 시민들의 ‘탈법’을 나무라는 대중의 목소리가 더 크게 터져나왔다.

반달리즘에 대한 비판이 준법 명령을 감히 어긴 사람들에 대한 꾸짖음이 되어야 하는가? 파리 경시청의 고등 간부가 파리의 이미지와 국익, 질서 회복을 위해, 별 이유 없이 집회시 과격하게 반달리즘을 행하는 이들, 시내 곳곳에 낙서를 남기는 그라피티스트들을 끝까지 특별 추적하겠다고 각별하게 공표했다는 이야기나 온 나라 사람들이 과격한 반달리즘에 공분을 표했다는 이야기가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무엇보다 이웃의 고통에 연대하고 사회적 정의를 고민하는 것을 최우선 윤리로 삼는 시민이라면 좌절했거나 흥분한 대중 일부가 공공장소나 공공집회에서 행한 반달리즘을 열렬히 비판하기보다 흥분조차 하지 않은 정치인이 내뱉은 거짓말이나 정치적 실책을 냉정하게 비판하는 일에 더 힘을 쏟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 등 서구 도시에 흔한 그라피티에 대해 ‘무질서’라고 규탄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금기를 깨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 한겨레

프랑스 파리 등 서구 도시에 흔한 그라피티에 대해 ‘무질서’라고 규탄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금기를 깨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 한겨레

이것이 야만인과 노예의 근성인가

‘문화재’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던 18세기 말, ‘반달리즘’이라는 말을 만든 이는 프랑스의 그레고리 주교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공화국 군대의 반달리즘을 규탄했다. 그는 혁명정부에 제출한 공화국 군대의 ‘반달리즘’에 대한 보고서에서 구체제 유산에 대한 공격과 파괴 행위를 야만인과 노예의 습성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자유로운 민중은 “과학을 증오하고 예술적 가치가 있는 기념물을 파괴”하는 대신 아끼고 보존해 구체제 유산의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비극이 일어났고, 비극에 대해 책임지는 토론의 결핍으로 인해 정치적 소란이 일었다. 이를 무조건 제압하려는 차벽이 세워졌고, 이에 항의하는 이들이 반달리즘을 행했다. 분명 국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경찰차량일 것이다. 그러나 이 차량과 차벽은 이날 자유로운 인간의 가치를 대변하지 못했다. 훼손된 자유 앞에서 스프레이로 “정권 파산”이라 적었던 이들의 정신은 위법일지언정 야만인과 노예의 근성과 무관하다.

이나라 이미지문화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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