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한 해를 보내고 프랑스로 돌아가는 남편과 택시를 탔다. 트렁크에 짐을 싣는 기사에게 가방에 책이 잔뜩 들어 무겁다고 알렸다. 책이 많다는 말에 택시 기사는 작가인지, 선생인지 물었다. 어디에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우리는 프랑스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좋은 곳에 가시네요. 여행 가세요?”라며 물었다. “아! 가보셨어요?”라고 말을 받았다. 머리가 희끗해지기 시작한 나이의 기사 아저씨는 “아니요, 저는 캐나다 퀘벡에만 가보았어요. 언제 프랑스에도 꼭 가보고 싶어요”라며 다짐하듯 말했다. “네, 아직 젊으시니까!” 나는 딸이 사는 곳에 딱 한 번 들렀던 나이 든 부모님을 떠올리며 답을 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비행기에 가득 찬 관광객들이 여행안내서를 탐독하는 사이로 화장실에 다녀오다 다시 택시 기사의 다짐이 생각났다.
자주 공항에 가는 나는 파리란 어떤 곳인지, 어디가 제일 좋은지, 파리와 서울 중 어디가 더 좋은지 등등의 질문을 받는 일에 익숙하다. 나는 여태 능숙하게 간단한 답을 하는 법을 모른다. 파리는 응당 아름다운 곳이지만, 파리에 아름답고 선한 사람이나 짐승만 서식할 리는 없다. 중세 이래 파리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노트르담 성당을 떠올리면 그 건너편 스퀘어 장미 덩굴 사이의 들쥐 무리가 함께 기억나고, 역시 들쥐 서식지인 지하철역 철로 위 깡통과 담배꽁초가 떠오른다. 지하철 역사 벽면을 가득 채운 흥미진진한 공연 포스터, 광고판 위의 익살 가득한 낙서가 연달아 함께 떠오른다. 사람에 놀라지도 않는 들쥐가 출몰하는 잔디 위에 아무렇지 않게 나란히 누워 샌드위치를 먹으며 책을 읽는 연인, 그저 새침한 이웃, 손님에게 퉁명스러운 가게 점원들과 함께 나는 파리에서 외롭고 자유롭다. 그러나 파리에 대해 묻는 사람, 특히 여행객에게 파리도 사람 사는 다 똑같은 곳이라고 답을 해서는 곤란하다. 21세기의 지구인 중 ‘파리’라는 단어에 결부돼 있는 판타지와 상상, 이미지의 세례를 받지 않은 이는 많지 않으므로.
비행기 안에서 이미 파리를 가본 청년지난여름 비행기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정말 앳된 얼굴의 청년(청년이 기내식과 함께 와인을 주문하니 승무원이 나이를 물었다. 청년은 스무 살이라고 답했다)은 스마트폰으로 파리 명소를 최적화된 조명 아래 찍은 사진 수백 장을 쉴 새 없이 살폈다. 한장 한장을 재빠르게 넘기는 모습을 곁눈질하면서 나는 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 꾸미고 외출했는데 모임에 온 모든 사람들이 대단히 잘 차려입어 혼자 주눅이 드는 마음, 게다가 아무도 내가 신경 쓴 무엇에 눈길도 주지 않았을 때의 마음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들뜬 마음으로 파리에 도착할 청년은 파리에서 무엇을 경험하게 될까, 바쁘게 걸어다니며 이미 스마트폰으로 읽고 보았던 에펠탑이나 노트르담 성당의 대략적인 ‘인상’을 그냥 ‘확인’하고 말 것이라 괜히 지레짐작해보았다.
나는 언젠가 파리에 꼭 가보고 싶다는 택시 기사 아저씨를 생각하다가, 파리의 들쥐 생각을 하다가, 수백∼수천 장의 이미지를 별일 없이 소비하는 것 같아 보이는 청년의 여행을 짐작하다가 공연히 불편하고 불안했다. 그러다 어린 시절 막 개장한 대규모 놀이동산에 있었던, 무척 조잡한 모형 지구촌 마을에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일이 생각났다. 아직 해외여행을 마음대로 떠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놀이공원에서 보았던 커다란 모형 풍차, 이국의 상징이었던 풍차 ‘모양의’ 무엇이 배치된 공원의 전경도 기억났다. 2010년 무렵 1년에 1천만 명 이상의 해외여행 출국자 수를 기록하는 한국에서, 21세기의 아이들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인스타그램의 여행지 사진을 보며 파리나 터키, 라오스에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아이였던 나는 텔레비전 뉴스 화면이 보여주는 놀이공원의 모형 지구촌 마을에 꼭 가보고 싶었다. 아직 야간 ‘타율’ 자율학습이 존재하던 시절 서울 잠실 근방의 여고를 졸업한 친구는 단체소풍이 아니어도 야자 시간에 친구들과 학교를 몰래 빠져나와 놀이공원에 가곤 했다. 고단한 한국 직장의 성과 압박을 잠깐 잊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국의 바닷가로 향하는 21세기 직장인들의 모습에 학교, 선생님, 부모님, 학원, 입시를 잠시 잊기 위해 놀이공원을 향하는 아이들이 겹쳐진다.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길을 잃는현대적인 테마파크의 원조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월트디즈니사가 195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세운 디즈니랜드다. 월트디즈니사는 자사의 대표 캐릭터들을 사용해 “꿈이 이루어지는” 환상의 공간으로 디즈니랜드를 구상했다. 세계 대형 테마파크 대부분을 소유한 디즈니사, 디즈니에 경쟁할 만한 규모의 테마파크를 소유한 유니버설사 모두 20세기 대중적 상상력의 보고인 영화 제작사다.
한국 최초의 대규모 테마파크는 지금은 ‘에버랜드’로 이름을 바꾼 ‘자연농원’이다. 이국의 조형물을 배치하고 약간의 놀이기구, 사파리와 동물원을 갖췄던 자연농원이 1976년 문을 열었고, 대형 놀이기구를 갖춘 종합 놀이공원(amusement park) 서울랜드가 1988년 문을 열었다. 호텔·백화점·영화관·아이스링크 등을 같은 장소에 갖춘 롯데월드 어드벤처는 점차 대형 리조트로 변신했던 디즈니랜드의 모델을 따르며 1989년 문을 열었다. 같은 시기 남한에서 유행하던 후기 자본주의, 고도 소비사회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지지자들은 롯데월드의 사례를 빈번하게 인용했다. 롯데월드는 한번 들어가 소비의 쾌락에 빠져들면 길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도록 하는 공간으로 묘사됐다. 한 프랑스 학자는 1980년쯤 개척과 모험의 땅 미국을 재현하고 있다는 디즈니랜드를 예로 들어 존재한 적이 없는 것(디즈니랜드)이 원본(미국이라는 실재의 세계)에 오히려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세계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테마파크는 아니지만 놀이공원은 도시가 팽창하고 여가시간을 확보한 계급이 등장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 사이 서구 대도시에서 휴식과 오락의 공간으로 큰 인기를 모았다. 1920년대 대공황 이전 미국에는 1천 개 이상의 놀이공원이 존재할 정도였다. 특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던 빈, 파리, 뉴욕 등의 도시들은 기술력을 과시하고 대중에게 눈요기와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놀이공원을 지었다. 영화 에 등장하는 오스트리아 빈의 놀이공원은 18세기에 처음 만들어졌고 1873년 빈 만국박람회 때 롤러코스터와 대관람차를 추가로 설치했다. 건축가 렘 콜하스는 20세기 맨해튼의 도시계획이 1880년대 조성됐던 뉴욕 코니아일랜드의 놀이공원을 본뜬 것이라고 주장한다. 코니아일랜드 놀이공원이 스카이라인, 복합적인 쾌락과 흥분의 공간을 갖춘 도시의 모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아기의 흥분이 집적된 놀이기구회화, 사진, 소설, 신문, 상품 진열장에서 이국(異國)의 취향을 대충 맛보며 상상했던 서구인들은 놀이공원에서 좀더 직접적으로 이국을 체험했다.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포획한 짐승, 심지어 인간이 놀이공원에 전시됐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런 장소를 가득 채운 호기심이 타 문화와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적인 과정을 용인했음을 비판했다.
이국적인 풍경 사이에는 놀이기구가 설치됐다. 1970년대 어린이대공원의 ‘청룡열차’부터 ‘88열차’ ‘프렌치 레볼루션’ 등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진화를 거듭하는 롤러코스터는 기차가 운행을 시작한 19세기에 등장한 놀이공원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롤러코스터는 놀이공원을 극단적 감각을 경험할 수 있는 현기증의 공간으로 인식되게 했다. 강한 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놀이기구 이외에도 회전목마, 공중그네, 대관람차, 공원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모노레일 등 역동적이고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놀이기구들이 존재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파리 시내에는 대관람차가 설치됐다. 대관람차는 놀이공원 내부나 공원 바깥 도시에 대한 파노라마를 감상할 기회를 제공했다. 1920년대 유럽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들은 놀이동산의 연회원인 요즘의 이웃 유치원생들처럼 놀이기구의 감각에 열광했다. 이들에게 놀이공원은 유아기의 욕망과 성적 흥분, 시각적 현란함의 장소였다.
오늘의 테마파크를 다시 떠올려보자. 대체로 ‘랜드’와 ‘월드’ ‘킹덤’ ‘스튜디오’라는 이름을 가진 테마파크 형식의 놀이공원에는 언제나 ‘궁전’(palace)이 아니라 영주의 ‘성’(castle)이 있다. 궁전이 도시 한가운데 위치한 서구 근대 권력의 거처라면 성은 외부의 침략에 맞서 거주민을 보호하는 영주의 거처였다. 그래서 성은 보통 중세적 상상력을 담고 있는 외딴 공간이다. 동화 속 마법의 성에는 성을 지키는 전설 속 괴물, 첨탑에 갇힌 공주, 공주를 구하는 왕자가 존재한다. 성은 숲을 가로지르고 다시 험준한 산 정상까지 올라야 겨우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고립된 장소다. 물론 노동과 의무, 규칙의 지배를 받는 동시대 일상 세계의 거주자는 모험을 감당하는 대신 돈을 지급하면 일상 바깥의 환상을 부여하는 테마파크에 입장할 수 있다. 고교 자율학습 시간에 견딜 수 없는 학교를 벗어나 롯데월드로 도망치곤 했다는 친구는 ‘어둠’ 속에서 배를 타고 모험을 하는 ‘신밧드의 모험’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19세기 서구의 상상물이 21세기 남한에19세기 유럽인들은 만국박람회장과 놀이동산 속에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믿었던 세계의 기물을 재현하고자 했다. 21세기 남한 첨단의 테마파크 내부는 여전히 19세기 서구가 상상했던 이국의 풍경, 역사의 풍경을 모방한다. 공룡과 인기 3D·4D 애니메이션의 배경과 캐릭터가 더해졌지만 여전히 열기구 아래 그리스 신전과 풍차, 중세의 성, 야자수가 곳곳에서 이국에 대한 서구의 판타지와 시각적 상상력을 답습한다. 19세기 서구가 상상하고 재현한 세계의 이미지는 이제 한국의 테마파크에 와서 연신 사진을 찍는 21세기 아시아 관광객의 상상력을 구속하고 제한할지 모른다. 그리고 놀이공원과 테마파크에서 이국의 풍경을 체험하던 일단의 지구인들은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내며 이국으로 직접 여행을 떠난다. 스스로 판타지가 되려는 관광지의 풍경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의 진위와 운명을 염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과연 테마파크 바깥을 여행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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