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한국 국민들이 정부에 갖는 신뢰도는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하지만 정작 큰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정부가 해결사로 나서길 원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정부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긴급하고 중대한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은 정부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 마지막 기대조차 무너지게 했다. 참사 이후 많은 이들이 ‘국가의 실종’이라는 말로 국가에 대한 상식이 산산이 파괴됐다고 이야기한다. 더구나 정부가 특별법 시행령과 배·보상 문제에서 보이는 최근의 행태는 이미 파괴된 국가에 대한 상식을 아예 방앗돌로 짓찧어서 가루로 만드는 격이다.
인문사회과학 영역에서는 이른바 ‘국가론’이 회자되고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기능을 파탄 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같은 논의들은 은연중에 국가중심주의를 뒷문으로 끌어들인다. 신자유주의가 일종의 ‘비정상국가’를 초래했으며, 따라서 신자유주의 극복을 통해 ‘국가의 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이성’이 온전하게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국가조직이 폭력에 연루되지 않는 적이 있었던가? 혹자는 물을 것이다. 그래도 평화시에 국가는 국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시스템을 갖춰야 하지 않는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불이 났을 때 불속에 뛰어드는 주체는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다.
자신이 국가라는 폭력 기계의 부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군인과 경찰은 타인에게 무차별로 총질과 몽둥이질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배가 눈앞에서 가라앉을 때, 자신이 명령을 기다리는 시스템의 말단이 아니라고 느끼는 구조대원은 촌각이 급하다며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문제는 눈앞의 사태와 그 사태에 결박된 타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이성적 존재가 국가 시스템에 자리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국가라는 시스템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지니는 기계적 결함 속에서 이기적이고 무능력한 인간을 양산하고 그로 인한 오작동을 무한 반복한다. 이 오작동의 연쇄는 끝내 세월호 사건 같은 참사로 귀결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참사 이후 ‘국가 개조’란 표현을 썼을 때, 그 말은 ‘기계로서의 국가’라는 실상을 간접적으로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당장 이런 질문이 나온다. 기계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 어떻게 기계 전체를 개조할 수 있겠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총체적 혼돈과 위기의 상황에서 이성은 국가기계 외부에서 등장하곤 했다. 국가기계 바깥의 집합적인 이성의 목소리가 국가로 하여금 이성을 갖도록 강제했다. 국가가 기계적 면모를 노골화하며 그 목소리에 불응하면, 때로 그 목소리의 주인들은 임시적으로 국가의 역할을 선포하고 수행해야 했다. 혁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14년 4월16일 이후 전남 진도체육관에서 일어난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가장 이성적인 목소리의 원천
세월호 참사 이후 가장 이성적인 목소리의 원천은 바로 희생자들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전문가들과 함께 특별법의 가안을 작성했고, 시민들과 함께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들은 가족을 잃고 짐승처럼 절규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절규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들의 절규에 공감하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절규하는 존재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식들의 죽음 앞에서 진상 규명이라는 공적 책임을 약속했고,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이성적 존재로 거듭났다. 그러므로 그들이 청와대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이유는 대통령에게 하소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절규 속에 국가가 갖고 있지 못한 이성을 품고 청와대로 향하는 것이다.
심보선 시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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