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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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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저 헌납하게 만드는 회사의 부르심

워크숍·산행·봉사 등 자율 활동이라지만 사실상 강제…

일로 인정받지 못하고음주나 무리한 활동 동반되는 행사로 인해 다치거나 숨지는 사고 잇따라
등록 2014-12-10 16:07 수정 2020-05-03 04:27
워크숍·산행·봉사 등 이런저런 회사 행사로 인해 주말·공휴일 시간마저 빼앗기는 직장인이 많다. 사실상 강제적으로 진행되는 천편일률적인 행사가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워크숍·산행·봉사 등 이런저런 회사 행사로 인해 주말·공휴일 시간마저 빼앗기는 직장인이 많다. 사실상 강제적으로 진행되는 천편일률적인 행사가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font color="#008ABD">은 제1037호 표지이야기 ‘출근하다 죽겠다’를 통해 장시간 출근길을 함께 버텨보았습니다. 밥벌이의 힘겨움. 어디 출근길뿐이겠습니까.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에서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문제를 ‘직장 OTL’ 시리즈로 꾸준히 다루려 합니다. 당신이 괴로운 까닭을 전자우편(saram@hani.co.kr, wani@hani.co.kr)으로 들려주세요.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겠습니다. 이번호에서는 장시간 노동도 모자라 금쪽같은 주말마저 헌납하게 만드는 다양한 회사 행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_편집자</font>


단풍이 흐드러지던 시월의 어느 토요일 새벽 6시. 김신영(33·가명)씨가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금요일 밤 10시. 한 잔만 더 하자는 친구의 청을 마다하고 집으로 향했다. 회사가 몇 달 전부터 공지한 산행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신영씨네 회사의 전 직원은 해마다 등산을 한다. 일종의 단합대회다. 전국은 넓고 타야 할 산은 많다. 올해는 충청도에 가잔다. 직원들 뜻은 아니다. 산이 싫지만, 선택권은 없다. 인사평가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떳떳하게 빠지려면 병원 진단서 같은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야간자율학습 빠지기보다 어렵다. 그나마 생리 시작일과 겹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토요일 아침 8시. 전세버스가 기다리는 집결 장소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부터 택시를 타고 허겁지겁 뛰어오는 사람들이 보인다. 울적함 뒤로 허기가 밀려든다. 회사에서 준 김밥을 입속으로 밀어넣었다. 목이 멘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산행이란 말입니까!’ 가슴속 외침에 돌아오는 메아리는 없다. 오전 10시가 넘어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됐다. 수백 명이 코스 하나에 몰리자, 등산객들의 원성이 귓전을 때린다. 목적지는 늘 그렇듯 정상이다. 슬금슬금 옆으로 새는 사람들이 보인다. 인사부 사람들은 안절부절못한다. 산 정상에 올라 파이팅을 외치는 직원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다. 꾸역꾸역 오르다보니 쓸데없는 승부욕이 솟구친다. 임원들과 함께하는 의미 없는 시간을 속절없이 보낸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토요일 밤 10시였다. 일주일 내내 얼굴 보기 힘들었던 남편과 수다 떨 기운도 없다. 삭신이 쑤시기 시작한다. 등산 후폭풍이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월요일 출근길에 나서야 한다.

<font size="3">병원 진단서 없인 빠질 수 없는 단합대회</font>

비슷한 시기 공가은(33·가명)씨도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멀리 산이 보일 무렵,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가은씨는 임신부다. 그렇다고 부서원이 모두 참여하는 워크숍에 빠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업무 혁신을 위한 워크숍이라고 했지만, 일정은 구태의연했다. 금요일에 출발해 토요일에 돌아오는 1박2일 일정에 산행과 회식이 추가됐다. 며칠 전부터 남편은 가은씨 몸이 상할세라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도 남편에게도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막상 흙을 밟으니 “전 빠지겠습니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몸이 불편한 상사나 동료도 별다른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스로 등산 고비를 넘기자, 지루한 술자리가 시작됐다. 배가 뭉쳐 앉아 있기조차 힘들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건 그저 상상 속의 일이다. 밤새 술잔이 도는 만큼 귀가 시간도 늦어진다. 워크숍 일정은 토요일 오전까지였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은씨는 결심한다. 혹시라도 팀장이 된다면, 이러한 시간 때우기 워크숍은 하지 않으리.

이런저런 회사 행사로 인해 주말·공휴일 시간을 빼앗기는 직장인이 많다. 은 취업 포털 잡코리아에 의뢰해 직장인 742명을 대상으로 온라인·모바일 설문조사를 했다. ‘주말·공휴일 등 개인 시간에 사실상 강제로 참석해야 하는 회사 행사가 있다’고 한 직장인은 602명(81.1%)에 달했다. 주말 시간을 앗아가는 행사 유형으로는(복수 응답) △야유회·워크숍(425명) △체육대회(220명) △직장 상사 경조사(177명) △등산·축구 등 사내동호회 활동(120명) △자원봉사(101명) △극기훈련 및 캠프(30명) 등이 언급됐다. 602명 가운데 206명(34.2%)은 ‘석 달에 한 번꼴로 빠지기 힘든 주말 행사가 있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주말 행사를 맞는다’는 이도 178명(29.6%)이나 됐다. 주말 등 쉬는 날에 열리는 회사 행사에 대한 반감은 컸다. 가장 참석하기 싫은 회사 행사(복수 응답)로 ‘주말을 끼워넣은 1박2일 일정의 워크숍·직원교육’(472명), ‘주말·공휴일에 열리는 행사’(382명) 등이 꼽혔다. 그렇지만 602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313명(52%)은 이러한 행사에 ‘가급적 참여한다’고 했다. ‘항상 참여한다’는 이는 173명(28.7%)이었으나, ‘매번 불참한다’고 답한 사람은 5명(0.8%)에 불과했다. 참여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선 ‘상사·동료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57.5%)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불참 사유를 제출하라는 압박’(13.5%)을 받거나, ‘참여 여부를 인사평가에 반영’(8.6%)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점차 중요해지면서, 새로운 주말 도둑으로 떠오르는 게 바로 ‘자원봉사’다. 특히 금융권에서는 개인당 연간 10시간 이상의 자원봉사를 의무화한 업체가 많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부서별 실적을 공개하거나 임원 평가에서 봉사 시간을 감안하기도 한다. 강제 아닌 강제 봉사가 될 여지는 충분하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공헌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회책임 컨설팅업체 SR코리아의 황상규 대표는 “사회공헌 정신의 바탕은 자발성”이라며 “자원봉사 시간을 일률적으로 의무화하기보단 내용 중심으로 종합적인 평가를 하고 독려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은수(34·가명)씨는 매달 두 차례 주말 시간을 할애해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자율적인 활동이었다면 보람이 컸을 것이다. 부서장은 봉사활동 실적에 민감했다. 개인적인 주말 일정까지 포기하며 봉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은수씨네 회사도 임직원들에게 일정한 시간 이상 봉사활동을 할 것을 요구한다. 업무에 치이다보면 평일에 봉사활동을 하기란 어렵다. 강제적 봉사활동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동료들이 많다. 그러나 사내 인트라넷이나 익명 게시판을 통해 이러한 불만이 터져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익명’ 게시판이 정말 익명인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font size="3">“휴일근로수당 지급하거나 보상휴가 줘야”</font>

음주나 무리한 신체 활동이 동반되는 회사 행사로 인해 다치거나 숨지는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일요일인 2012년 11월25일 지역 우체국장 정아무개(당시 52살)씨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노사 한마음 대축제’에 참여한다. 전남 고흥우체국 관내 전 직원이 참석하는 행사로 ‘구성원 간 유대 강화 및 활기찬 직장문화 조성’이 목적이었다.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강조되면서 임직원들에게 연간 일정 시간 이상의 자원봉사 활동을 의무화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한 업체 임직원들이 무허가 판자촌에 연탄 등 겨울 생필품을 전달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강조되면서 임직원들에게 연간 일정 시간 이상의 자원봉사 활동을 의무화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한 업체 임직원들이 무허가 판자촌에 연탄 등 겨울 생필품을 전달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

오전 1부 행사는 고흥우주마라톤대회(5km)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정씨 역시 대회에 참여한다. 그는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적이 없었다. 마라톤을 마친 뒤 점심 식사를 하러 가던 정씨가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끝내 숨졌다. 유가족은 공무원연금공단에 유족 보상금 지급을 요청한다. 공단은 정씨의 사망이 공무와 무관하다며 이를 거절했다. 2013년 유가족은 서울행정법원에 유족 보상금 지급 거절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재판부는 지난 11월 “업무의 일환으로 체육행사 일정 중 하나인 마라톤을 뛰어 육체적으로 갑작스럽게 무리하게 됐다”며 “고인의 사망과 공무상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가은씨는 1박2일 워크숍을 당연히 ‘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신영씨는 강제로 산에 올랐으나 ‘일했다’라고 하기엔 애매한 것 같다고 했다. 두 회사는 이들이 할애한 주말 시간에 대해 따로 보상하지 않았다. 주말 워크숍이나 단체 산행을 ‘일’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유성규 노무사(노무법인 참터)는 “회사가 주말에 행사 참여를 지시하는 등 강제성이 있다면 업무로 봐야 하다”며 “이러한 경우 휴일근로수당을 지급하거나 보상휴가 등을 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긴 노동 시간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만큼, 노동 시간에 대한 의미를 되짚는 작업이 필요하다. 근로기준법상 아무런 일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사용자의 지배·감독을 받는 시간은 근로시간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당연히 받아야 할 연장근로수당도 받지 못하는 직장인들의 현실에서 이러한 권리를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주말 행사 대부분은 사실상 ‘강제’지만 표면적으로는 ‘자율’ 활동인 경우가 많다.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하는 회사 행사가 단합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 있긴 한 걸까. 다국적 인사컨설팅업체인 타워스왓슨코리아 김기령 대표는 “정말 ‘한마음’으로 하자는 취지가 있다면 강제가 아닌 자발적 참여가 중요하다”며 “천편일률적 사내 행사가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주말 행사는 경영진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유한킴벌리 손승우 대외협력본부장은 “우리 회사의 경우 워크숍은 업무 시간 내에 소화한다. 의무적으로 채워야 할 자원봉사 시간을 부여하기보단 개인이 스스로 목표를 정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기 커뮤니케이션 컨설팅회사인 더랩에이치의 김호 대표는 “주말이란, 가족이 됐든 친구가 됐든 직장 동료가 아닌 사람들과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보장돼야 하는 시간”이라며 “회사의 장기적 비전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하는 자리를 뜻하는 ‘워크숍’은 당연히 업무 시간 내에 해야 한다. 경영진이 워크숍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font size="3">개인 시간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font>

유성규 노무사는 “외국계 회사의 경우, 근로계약서에 기재된 시간만을 회사가 사용 가능한 시간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 시간과 개인 시간의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분석했다. ‘평생 고용’을 보장해주던 과거엔 ‘내 직장, 우리 회사’라는 마인드가 강해 회사가 개인 시간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고용 안정성이 깨진 상황에서, 개인 시간까지 침해하는 직장문화에 대한 저항감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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