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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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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DJ

수년째 동시간대 청취율 1위인 <배미향의 저녁스케치>의 PD이자 DJ 배미향씨
“제 방송에 위로받는다고 하지만 위로받는 건 저예요, 진짜로”
등록 2014-01-02 02:13 수정 2020-05-02 19:27
김명진

김명진

지난번 인터뷰 후 나는 한동안 ‘몸보다 마음’이라는 화두에 오래 잡혀 있었다. 내게 그 인터뷰의 소감을 전하는 이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당사자인 강용주 원장은 ‘나도 모르는 나와 내가 보려고 하지 않는 나를 들여다볼 시간을 함께 나눠서 버겁고 가볍다’고 전했다. 무엇이 버겁고 무엇이 가벼웠을까. 앞으로 누구를 만나 얘기를 나누든 늘 그 생각이 맴돌겠구나 예감했다.

뻔하지만 여전히 파괴력 있는 우스갯소리에 빗대자면, 세상에는 ‘배미향’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의 목소리와 음악으로 위로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배미향은 CBS 라디오에서 14년째 라는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PD 겸 DJ다. 방송을 통해 그의 프로그램을 듣고 있는 이들의 반응은 붕어빵처럼 비슷하다. 편안한 목소리와 음악으로 위로받는다는 것이다. 오랜 애청자인 나도 그런 붕어빵 부류에 속해 있다.

실제로 배미향을 아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의 이름을 상징하는 열쇳말은 ‘위로와 편안함’이다. 당연히 열광적 반응은 그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위로와 편안함을 얻기 위해서 열광하는 건 어쩐지 좀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듯 고요하게 배미향을 애정한다. 오랜 시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초지일관 편안하게 하고 다독다독할 수 있었던 근간은 무엇이었을까. 정작 배미향 본인도 모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편안함과 위로를 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행복하게 사는 일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 그가 38년째 재직 중인 기독교방송국으로 찾아갔다. 다짜고짜 물었다.

“저에겐 방송도 음악도 일상이에요”

-를 제작하고 진행하는 게 정말 좋으시죠.
=좋아요. 정말 좋죠. 이 프로그램은 PD의 역할도 진행자의 역할도 작가가 써준 멘트를 넣고 빼는 것도 제 권한이에요. 믹싱도 제가 해요. 곡이 끝나는 마지막 어디에서 다음 곡이 치고 들어와야 이 두 곡이 기가 막히게 엮어진다는 게 저는 와요, 촉으로. 그러니까 2시간 동안 내 색깔대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구성과 음악으로 방송을 하는데 이걸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러면 ‘어머, 너무 좋다. 내 거 이렇게 좋아해줘서’ 그런 마음이죠.

-나란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느낌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너무 행복하죠.

-배미향이란 사람의 방송을 들으면 그때마다 기분이 좋은 게, 잔잔하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일하는 누군가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걸 들켰어요.

-저 말고도 듣는 사람은 다 알걸요.
=곡 소개를 할 때 제목 소개를 하면서 앞소절을 부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가끔 음악이 나갈 때 그렇게 해요.

-들렸을 거예요.
=네, 맞아요.

어설프게 넘기는 탁구공을 내색하지 않고 우아하게 맞받아쳐주는 국가대표 탁구선수와 랠리하는 느낌이라서 그의 방송을 듣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하는 모든 음악 프로그램 중에서 동시간대 청취율 1위라면서요.
=그런 셈이죠. (웃음) 동시간대도 1위고 CBS 통틀어서도 1위예요. 오래됐어요.

-기분이 어떠세요.
=글쎄요. 저는 그런 거에 연연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이름이 인데 한 5년 정도는 제 이름이 없었어요. 그냥 였죠. 제 이름을 넣으라고 해서 넣긴 했는데, 저는 저를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요.

-흔히 방송은 치열한 경쟁이고 전쟁이라고 하잖아요. 꼭대기에 오르려면 어마어마한 노력과 치열한 작전이 있어야 한다고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죠. 실제로도 그래요. 근데 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정말 아니에요. 저는 전쟁 치르듯 방송하지 않아요. 그냥 일상이에요. 음악도 일상이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아주 편안하게 해요. 그렇게 하는데 제 프로그램이 1위를 하는 거 보면서 그런 생각은 하죠. ‘아, 위안이나 편안함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 게 맞구나.’ 왜냐하면 제 프로그램을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좀 시끄럽다든가 번잡스러운 걸 싫어한다는 말인데 그런 프로그램이 계속 1위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저녁 6시라는 시간대도 장점인 듯싶고요.

음악 위해 프랑스어·스페인어 공부

-음악의 영향력도 큰 거겠죠.
=물론이죠. 하지만 저는 음악도 치밀하게 선곡하지 않아요. 내가 이 시간에 운전하면서 간다면 어떤 음악을 듣고 싶을까 생각해요. 빈 순서지에 광고 들어가는 시간대와 광고주 순서만 표시해놓고 음악은 진행하면서 그때그때 정해요. 신청곡이 모바일로, 레인보우로, 카톡으로 들어오면 곡의 순서가 죽 나와요. 그러니까 힘을 전혀 안 들이고 선곡하는 거죠. 그래서 어떤 후배 PD가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있어요. “나는 죽어라고 노력을 다해도 잘 안 되는데 선배 보면 탱탱 앉아서 노는 것 같은데 왜 청취율이 저렇게 잘 나오는 거야?”

자기가 좋아하는 일(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하는 사람을 당하긴 어렵다. 명백한 축복이다. 배미향은 그런 축복의 세례를 한껏 받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 후배도 알면서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의 방송이 왜 그렇게 입에 착 감기는 맛처럼 편안한지 알 것 같은 느낌.

-만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요.
=첫째는 음악의 구성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음악 구성은 자신 있게 할 수 있거든요. 그다음엔 음악에 어우러지는 목소리, 그러니까 맛깔스러운 거하곤 좀 다른 건데 쭉 음악을 내는 것보다 목소리가 들어가서 음악이 더 맛있어진다고 할까요. 그리고 거기에 묻어나는 편안함. 그 세 가지가 우리 프로그램을 특징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청취자의 느낌과 제작 진행자의 생각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꽉 맞는 느낌. 음악 얘기를 할 때마다 설레는 봄처녀 같아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당연한 질문을 했다.

-음악을 듣는 일이 무척 행복하신 거죠.
=행복하죠. 저는 방송 외적으로도 항상 음악이 붙어 있는 거 같아요. 어디 가서 음악이 안 들리면 ‘여기 음악 없어요?’ 묻게 돼요. 아무리 작아도 다른 소리보다 음악 소리가 귀에 먼저 들어와요. 음악이 같이 있다는 자체로 저는 행복해요. 내가 하는 일이란 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가지고 하는 거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자신도 있나봅니다. 음악 얘긴 어느 때보다 씩씩하세요.
=자신이 있습니다. 빈 종이 주고 음악으로 2시간을 꾸며봐라 그러면 저는 하루 종일 분량이라도 채울 수 있을 거 같아요. 곡이 머리 속에 떠올라요. 예를 들어 두 곡이나 세 곡을 이을 때는 시작과 끝을 알기 때문에 이을 수 있는 거거든요. 이 곡이 어떻게 시작되고 요 곡은 어떤 악기로 끝나기 때문에 요 뒷곡은 뭐가 좋겠다 그런 식으로요.

-방송을 할 때 멘트를 최대한 절제하는 것도 음악 듣는 데 방해될까봐 그런다면서요.
=네. 음악 프로그램은 음악이 귀에 거슬리지 않아야 해요. 2시간에 25곡 정도 나가는데 2시간이 언제 다 지났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팝만 오래 하니까 갈증이 생겨서 관심을 가진 게 샹송, 스페인 음악, 포르투갈, 제3세계 음악들이에요. 그런데 그 곡들을 틀려면 제목을 얘기해줘야 하는데 프랑스어를 모르면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프랑스어 학원을 다녔죠. 그러고 나니까 스페인어가 또 필요해져요. 그래서 배웠죠. 아주 능숙하지는 못해도 조금 수월하게 발음하고 뜻을 알려줄 수 있게는 된 거죠. 제가 음악을 틀 수 있는 영역이 더 넓어졌다고 볼 수 있죠. 그 곡들을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부드럽게 소개할 수도 있고요.

“청취자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원래 음악을 하려고 하셨어요.
=아니요. 어릴 때부터 집에 있는 팝송 LP판을 듣는 걸 좋아했고, 결정적으론 음악감상실 보조 DJ로 일하면서 음악적 안목이 쌓인 거 같아요. 그때 아침이나 밤 시간에 보조 DJ를 하면서 음악감상실에 꽂혀 있는 LP를 다 꺼내서 그야말로 머리에 입력하듯이 봤어요. 이 음악은 뭐고 이 가수는 누구지, 그러면서 그 곡들을 다 들은 거지요. 좋아서요. 벌써 30년이 훨씬 지났는데 아직도 그 앨범 이름을 다 외우고 있어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면서도 자신이 들려주는 모든 음악을 ‘배미향표 음악’으로 만드는 솜씨는 가히 재능에 가깝다. 지난 14년간 그가 직접 선곡해서 발매한 4개의 편집 앨범은 모든 시리즈가 플래티넘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배미향이 들려주는 음악의 색깔은 그의 목소리와 닮아 있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그의 음악과 목소리는 합체 로봇처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청취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하는 배미향의 목소리에 대한 감탄은 유별나다. ‘노곤함을 씻어주는 천상의 목소리, 차분하면서도 지적이다, 나지막하고 부드럽지만 신뢰를 준다, 더할 수 없이 따뜻하다’ 끄덕끄덕.

-그런 천상의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아끼기도 쉽지 않겠어요. 제가 보기엔 는 절제가 일종의 철학처럼 보일 정도예요.
=저는 삶에서 절제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일상적으로도 그렇고 감정적으로도 그래요. 슬프거나 불우한 사람이 있으면 위로를 잘하지만 그냥 빠져들지 않고 적절한 선을 지켜요. 그 사람이 다시 감정을 스스로 추스를 수 있게요. 쌀쌀맞은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하는 게 편해요. 그게 방송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거 같아요. 저는 청취자들의 사연만 소개하고 나머지는 청취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여백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결론을 안 내리는 거죠. 사연 소개하고 간단하게 코멘트할 거 있으면 하는데 어떨 땐 사연 소개 후 슬쩍 웃고 음악으로 넘어가요. 음악이 나가는 동안 청취자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여백을 주는 거죠.

-방송에서 진행자의 개인사를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는 철칙에 엄격한 것도 비슷한 이유겠군요.
=다른 진행자들에게 거슬리는 게, 저건 안 했으면 좋겠다 싶은 게 본인의 사생활 얘기예요. 내가 아침에 나오는데 우리 아이가 어떻고 남편이 어떻고 그걸 누가 듣고 싶어 할까요. 그게 왜 궁금하겠어요. 그건 방송의 군더더기라고 생각해요. 제 방송을 듣고 게시판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이나 오래 듣다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후기를 남기는 분들이 있는데 그때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가 ‘이렇게 절제된 방송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근데 저는 의도적으로 절제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 진행이 편해요.

어찌 보면 심리 상담의 현장에서 상담자가 가져야 할 중립성이라는 것도 비슷한 구조다. 상담자의 색깔이 진하지 않고 중립적이어야 얘기하는 사람이 자기 감정을 마음껏 투사할 수 있다. 고전성(古典性)의 기본도 그런 심리적 구조와 맞닿아 있다. 우리 삶 속에서 클래식의 미덕이 지루함이라기보다 안정과 편안함 쪽에 가까운 건 그래서다. 국내 최고의 팝음악 방송 중 하나인 배미향의 방송이 클래식 프로그램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일지 모른다.

“이 방송 없었다면 어떻게 견뎠을까”

-많은 사람들이 일관되게 배미향의 방송을 들으면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편안해진다고 말을 합니다. 저도 그렇고요. 본인은 그렇게 위로받고 편안해지는 곳이 어디인가요.
=제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이죠. 제 방송을 듣고 위로받는다고 하지만 그 반대예요. 제가 그분들에게 위로받아요. 진심입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어투로 그가 말했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이들이 팬들 덕분이라며, 상투적으로 하는 말처럼 들릴까봐 걱정하는 눈치다. 가능하다면 마음이라도 열어보일 듯한 표정으로 깊게 눈 맞춘 얘기라서 나도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셨어요.
=저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바뀐 게 있다면 예전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많이 위로받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진심이에요. 살다보면 삶의 굴곡들이 있잖아요. 이 방송이 없었다면 그런 것들을 어떻게 견뎠을까, 어쩔 뻔했나. 주변에서 가까운 사람들도 그래요. ‘그 방송이 당신을 살렸다’ 그렇게까지 얘길 해요. 그게 온전히 맞다고 생각해요.

-그런 진심들이 서로 교류된 거겠군요.
=저는 정말 방송으로 위안받아요. 제게 그 2시간은 힐링이 되는 시간이에요. 청취자들의 위로가 아니었다면 성산대교에 차를 끌고 가서 뛰어들었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까지 들어요, 정말. 얼마 전에 편집 앨범이 나와서 팬사인회를 했는데 주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DJ’라고 붙여놨더라고요.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뭐라 했더니 ‘당신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가만 생각해보니 ‘맞네, 나 정말 행복하구나’. 그래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항상 내게 태산 같은 위로를 주는 누님이, 문득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나 때문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고 손잡고 말해줄 때처럼 가슴이 쩌릿해지는 느낌. 배미향의 음악 세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겠구나 하는 기분 좋은 안도감에 미소지었다.

-방송 말고 딴걸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으세요.
=평생 이것보다 더한 우선순위는 없어요. 어딜 가도 방송은 내가 제일 잘할 것 같고, 제일 좋아하기도 하고요. 음. 굳이 있다면, 방송이 본업이 될 줄 몰랐던 음악감상실 보조 시절에 패션 관계 일을 하고 싶다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있어요. 패션 코디 같은 건 잘할 것 같아요. 남들이 보기에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재능도 있는 거 같고. 지금도 그런 옷 코디하는 게 재미있어요.

-누굴 제일 많이 해주세요.
=저요. (웃음)

-본인 말고 누구 딴 사람 해주는 사람은 없으세요.
=없어요. 저만 해요.

절제된 스리쿠션 위로

이번엔 소리내지 않고 나만 웃었다. 그래서 그런가요. 안팎으로 충분히 아름다우세요. 문득 그에게 문태준의 시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졌다.

“앓는 병 나으라고/ 그집 가서 마당에 솥을 걸고 불만 때다 왔다/ 오고 온 병에 대해 물어 무엇하리,/ …/ 마른 씨앗처럼 누운 사람에게/ 바늘 같은 새살은 돋으라고/ 한 계절을 꾸어다 불만 때다 왔다” -문태준, ‘불만 때다 왔다’

그렇게 절제된 스리쿠션의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오랜 세월 그의 방송으로 위로받은 이들을 대표해 다정하고 친밀한 인사를 건넨다. 미향씨, 고맙습니다. 지금 그것으로 충분하고 말고요. 충분한 사람이세요.

이명수 심리기획자, 녹취 강선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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