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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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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이 아닌 완생을 향하여

등록 2013-05-20 09:24 수정 2020-05-03 04:27

언제부턴가 중년남성은 우리 사회의 문제적 단면을 드러내는 주요한 소재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때로는 실소를 자아내는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연민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중년남성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종합하면 대체로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청춘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주목이라도 받지만 가족 부양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는 중년남성은 ‘아플 수도 없는’ 딱한 존재라는 연민의 테마.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중년남성이라는 식의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담론이다. 둘째, 자기 관리에 실패하고 찌질해진 중년남성에 대한 비판과 자기계발 담론. 이런 이야기 속에 중년남성은 직장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독립적으로는 무엇 하나 할 수 없기에 ‘젖은 낙엽’으로 아내에게 빌붙어 살아야만 하는 존재로 취급된다. 늘 아내에게 야단맞지만 아내 없이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는 하찮은 존재로서의 중년남성이다. 중년남성의 문제를 발랄하게 풀어온 김정운씨는 이들에게 소폭잔을 내려놓고 직접 커피를 갈아 마시거나 레코드판을 수집하는 등 취미생활을 시도하라고 충고한다. 에이, 설마… 그런다고 찌질한 중년남성이 근사해질 수 있을까?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평소 필자가 궁금하게 생각한 것은 왜 중년 중에서도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문제시될까다. 나도 여성이지만 중년여성의 문제보다 중년남성의 문제에 관심이 더 많다. 직장에서 주요하게 관계 맺는 사람들을 포함해 자주 접하게 되는 이들이 중년남성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관찰자 위치에서 이들을 살피면서 예전에는 왜 인생을 저렇게밖에 못 사는가 한심해한 적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나 역시 한때 비웃던 그들의 모습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불안이 엄습해온다. 그들의 문제는 중년의 문제도 남성의 문제도 아닌, 이 시대 우리의 노동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일터의 논리에 적응한 결과물이 오늘의 중년남성이다. 그래서 이는 연령과 성별을 넘어 대한민국에서 공적 영역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대부분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문제인 것이다.

세상에 어디 힘겹지 않은 노동이 있으랴. 성공이 아니라 겨우 중간 정도만 가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이들도 낙오될까봐 더 가혹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다보니 결국 노동은 소외되고 삶은 초라해졌다. 무한경쟁의 게임판에 있는 한 그 누구도 존엄해지기 힘들다. 직장이라는 디스토피아에서 살아남아 최고의 자리에 올라 칭송과 부러움을 받아온 이들이 어쩌면 ‘라면상무’인지 모른다. 소외된 노동과 경쟁 시스템이 만들어낸 괴물!

알베르 카뮈는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돼 죽어간다”고 했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생활을 위해 노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외된, 영혼 없는 노동으로 인해 질식돼가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찌질하면서도 측은한 ‘중년남성’의 모습이다. 나를 포함해 이 시대 노동하는 이들의 현재이자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정의 달인 5월이 노동절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행복한 노동 없이 가정의 행복도 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전혀 행복하지 않은지 모르겠다. 노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노동에 속박돼버린 우리는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미생)가 아닐까? 영혼이 있는 노동, 그래서 내가 삶의 주체가 되는 완생의 삶은 가능할까?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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