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한 뒤 수도 바그다드 곳곳에 설치된 검문소에서 미군 병사들은 다가오는 차량을 향해 손바닥을 펴들고 팔을 아래로 내리는 수신호로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라크인들은 이를 ‘이리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운전자는 겁먹은 채 다가갔을 것이고, 검문소 군인도 정지 명령을 거부하는 정체불명의 차량에 겁이 났을 터. 병사가 그런 차량에 위협 사격을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났고, 때론 직접 사격을 가해 탑승자가 숨지는 사고도 일어났다. 몇 달 뒤에야 미군은 주먹을 쥐고 정지 신호를 보내도록 하는 조처를 취했다.
이 이야기는 미국 시사주간지 의 바그다드 특파원을 지낸 보비 고시가 최근호에서 이라크 전쟁을 회고하며 쓴 기사의 한 대목이다. 그는 미국과 이라크의 서로에 대한 무지가 어떻게 전쟁과 비극을 불렀는지 돌아본다. 황당한 이야기들이 많다.
미군은 몇 달에 걸쳐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이라크에 대해 무지했다고 한다. 고시 기자가 인터뷰를 한 이들이 오히려 그에게 시아파와 수니파의 차이 같은 걸 물어오기도 했다니 ‘놀라울 정도’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이런 무지는 이라크 쪽도 다르지 않았으니, 후세인 정권의 관료들은 부시 미국 대통령이 결코 침공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고, 침공하더라도 일시적인 타격을 가한 뒤 신속히 철수할 것이라고 전망했단다. 미국 영화 을 본 이라크 반군지도자가 “미군 헬기 3대만 추락시켜 병사들의 주검을 끌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면 미국 여론이 움직여 미군이 철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무지로 무장한 두 세력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전쟁과 내전의 나락으로 수많은 병사와 민간인 청년을 몰아넣어 피 흘리게 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은 것은, 사실 한반도의 오늘을 함께 떠올렸기 때문이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외교전문을 통해 우리의 외교안보를 담당하는 고위직 인사들의 대북 인식이 속속 드러났는데, 상당수가 북한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에 바탕한 발언들이었다. 이에 대해 민간 전문가들은 “망상” “미몽”이란 극단적 표현으로 비판한다(14쪽 표지이야기 참조). 미국 의 데이비드 생어 기자도 이번에 폭로된 외교전문에 드러난 한·미 고위 관리들의 북한 관련 분석을 “팩트는 별로 없는 장황한 추측”이라고 평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장이 높은 지역의 하나인 한반도에서 누구보다 호전적인 세력을 상대해야 하는 정부와 그 동맹 세력이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희망과 추측에 의존해 정책과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면, 그건 단순한 무지보다 더 참혹한 재앙을 불러올 일 아닌가. 미국도 중국도 우리도 북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 그리고 아마도 북한 역시 미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에 대해 저 이라크 반군지도자처럼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호에 이어 또 묻게 된다. 무지를 깨고 냉정한 사실 파악과 과학적인 전략 수립을 하기에 적대와 대치의 상황이 유리한가, 협상과 대화의 상황이 유리한가? 강경한 군사주의가 효율적인가, 강온 양면의 외교적 해법이 효율적인가? 이번호 표지 그림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어설픈 군복을 입힌 것은 맨몸으로 전선에 나서는 병사의 심정으로 이런 질문을 숙고해보라는 권유다. 우리의 미래에 드리운 재앙의 불길한 그림자를 한번 응시해보라는 요청이다.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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