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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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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군들, 몸 다치지 마라” 총장님의 당부가 그립다


‘고려대學’ 강의하며 다른 학교 폄훼부터 한 이기수 총장에게

고려대 출신 기자가 던지는 고려대 정체성에 대한 질문
등록 2010-09-16 09:44 수정 2020-05-03 04:26
고려대 서울 안암캠퍼스 본관 앞의 김성수 동상.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고려대 서울 안암캠퍼스 본관 앞의 김성수 동상.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나, 고대 나온 남자다. 아내는 고대 나온 것으로 부족해, 그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장인과 장모는 고대에서 함께 공부하다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대학 입학 때부터 지난 18년 동안 나는 고대 근처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가끔 조깅을 해도 고대 운동장에서 뛴다. 초등학교 5학년인 우리 딸은 세상에 대학교라곤 고대밖에 없는 줄 안다.

제국대, 미션스쿨 그러나 고대는 민족대?

이 글을 쓰고 있는 9월10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붉은 티셔츠의 무리를 보았다. 붉은 악마는 아니고 고대생들이다. 이틀간 열리는 ‘고연전’(어떤 이는 ‘연고전’이라 한다)의 첫날이었다. 저 신촌에서는 푸른 티셔츠의 무리들이 달려오고 있을 테다. 그들을 따라 잠실 야구장, 목동 아이스링크에 가버릴까? 문득 나는 옛 정체성이 그리워졌다.

고연전은 고대생의 집단 정체성이 형성되는 최고의 ‘의례’다. 1993년 가을 고연전을 앞두고, 고대 축구팀 스위퍼 이임생은 국가대표팀 합숙소를 무단 이탈했다. 미국 월드컵 예선전이 코앞이었다. 국가대표 감독은 나가지 말라 했고, 고대 감독은 나오라 했다. 이임생은 태극마크와 월드컵을 포기하고, 붉은 줄무늬 유니폼과 고연전을 택했다. 곧바로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제명됐다. 1-0으로 고대가 이겼다. 이임생은 고대 총장과 함께 연단에 올라 모든 고대생의 환호를 받았다. “고대, 만세!” 그렇게 연호했던 것 같다. 고대의 정체성은 대한민국보다 우선한다.

그 정체성을 포함해 여러 집단 정체성의 융합이 바로 ‘나’다. 나는 집안의 장손이고, 대구에서 자랐으며, PD(방송국 직군 말고 운동권 말이다)들과 어울렸고, 한겨레신문사 기자고, 결국 한국인이다. 각 집단의 정체성을 섞으면 나를 얼추 설명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맘에 쏙 드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막내딸이었다면, 고향이 광주였다면, NL이었다면, 핀란드인이었다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이기수 고대 총장은 지난 9월6일 혼란스런 내 정체성의 일부를 설명해주었다. “국립대학(서울대)은 일본이 침략의 방편으로 만든 관립대학이었고, 연세대·이화여대는 기독교 전파의 수단으로 만든 대학이었다. 고려대는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자’는 건학이념으로 만들었다.” 총장이 직접 강의하는 이른바 ‘고려대學’ 첫 수업의 내용이었다. 서울대·연세대·이화여대 등이 제국대학·미션스쿨의 후신인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총장의 강의에 두 가지 잘못이 있다. 남의 흠을 들춰낸다 하여 내가 잘나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를 치장한다 하여 오늘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고대 설립자 김성수는 가난한 선비 집안 출신이다. 19세기 말, 그의 증조부가 전북 고부의 대지주에게 장가가면서 가세가 폈다. 김씨 집안이 전북 고부 대지주와 연을 맺던 시기, 바로 그 고장에서 관리·지주의 착취에 견디다 못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김성수 아버지대에 이르러 이 집안은 다시 한번 크게 일어섰다. 일본에 쌀을 수출하고, 경성방직을 세워 만주에 물건을 팔았다. 절대다수의 조선인이 경제적 궁핍의 밑바닥을 체험하던 1910~30년대의 일이다. 1943년 김성수는 이런 말도 했다. “대의에 죽을 때에 황민의 책무는 크다.” “나는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으라.” 그가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자”는 뜻으로 고대를 세운 것이 맞다 해도, 그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는 제대로 밝힐 필요가 있다.( ‘김성수 집안 재산 축적기’ 참조)

교수는 영어 능력 필수, 와인 마시기 운동…

지난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가 발간한 에는 김성수의 이름도 올라 있다. 책에 나온 친일 행적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중일전쟁의 의미를 알리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시국강좌 참여 △총독부 학무국 주최 전 조선 시국강연대회 참여 △경성군사후원연맹에 1천원 국방헌금 헌납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 △학도지원병 참가를 독려하는 다수의 글 발표…. “민족자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불가항력’의 논리로 그를 변호하는 이도 적지 않다. 한때의 잘못을 근거로 평생을 매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전과자라 하여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저지른 잘못의 대가는 치러야 한다. 반성하거나 처벌받아야 ‘사회적 갱생’이 가능하다. 김성수는 그런 일 없이 해방 이후 대한민국 부통령까지 지냈다.

경성방직·고려대·동아일보 등을 건립한 김성수가 일제 시기 ‘토착자본가’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 하여 곧장 민족자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 땅에서 돈을 번 자 가운데는 민중의 고혈을 빨아 일제에 부역하며 일신의 출세를 도모한 ‘매판자본’도 있다. 식민지 조선의 최고 부자였던 그가 독립운동가에게 자금을 댔다는 게 사실이라 해도, 그가 일제에 침략전쟁의 자금을 쾌척한 것 역시 사실이다. 백번 양보해도 김성수는 ‘친일 논란’의 대상이 될지언정, 순수무구한 민족자본가는 아니다. 그 대목을 빼놓고, 제국대학과 미션스쿨을 험담하면, 남들이 코웃음치기 마련이다.

한 세기 전의 ‘친일 여부’를 길게 논할 것 없이 세간의 비웃음을 사는 이유는 오늘에도 있다. 한국사·국문학을 포함해 모든 학과의 신규 교수 임용 때, ‘영어 강의 능력’을 요구하는 대학이 있다. 사석에서 만난 그 대학 인문계열 교수들은 “한국 학생에게 국문학을 가르치는데 왜 영어로 수업해야 하느냐”고 개탄한다. 느닷없이 와인 마시기 운동을 펼치다, 막걸리 열풍이 불자 슬그머니 와인 행사를 접어버린 대학이 있다. 사석에서 만난 그 대학 학생들은 “아무리 부잣집 자제들이 득시글대는 학교라도 어떻게 학생이 와인을 사마시겠느냐”고 개탄한다.

국내에서 최고로 비싼 공대·의대 등록금을 필두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등록금 인상률을 선도한 대학이 있다. 특목고 출신 학생을 집중적으로 입학시키고, 총장이 나서 “기부입학을 찬성한다”고 말하는 대학이 있다. 사석에서 만난 고향 후배들은 “강남 부자들만 가는 대학이 됐으니, 지방 출신은 명함도 못 내밀게 생겼다”고 개탄한다. 이 대학은 지난 10여 년간 가장 ‘탈민족적’이고 ‘탈서민적’인 행보를 최선봉에서 걸어왔다. 권력자의 지배 논리를 관철시키는 게 제국대학이고, 자본주의적 서구 논리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게 미션스쿨이라면, 고려대는 이들의 ‘건학이념’을 오래전에 끌어안아버렸다.

고려대 교우회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는 교우회보를 배포했다. 교우회 간부들이 벌금형을 받았다. 그러고도 지난 6·2 지방선거 때는 이 대학 출신 후보들의 지지를 요청하는 전자우편을 교우들에게 보냈다. 이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권력에 줄을 댈 수 없다 하여 ‘고·소·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자기들끼리 권력을 독점하려는 ‘패거리 대학’이라는 비난이 먹혀들 자양분을 쉼 없이 제공하고 있다. 민족 고대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서)民(의)敵’ 고대로 변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정권의 제적 요구를 따르지 않았던 그때

고연전이 치러지지 못한 적이 있다. 1983년 가을이었다. 당시 고연전은 수만 명의 학생이 ‘합법적으로’ 거리에 나설 기회였다. 경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를 염려한 전두환 정권이 행사를 취소시켰다. 고대생들이 학생회관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경찰의 학내 진입과 연행이 불 보듯 뻔했다. 고대 총장이 경찰의 진입을 막았다. 대신 총장은 학내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학생 제군들, 몸을 다치지 마라.” 다음날 학생들은 무사히 학교 밖으로 나갔다. 총장이 나서 당국과 협상한 결과였다.

이듬해 가을 고연전 무렵, 전두환 정권은 총학생회 간부를 제적시키라고 전국 대학에 명령했다. 모든 대학이 그 명령을 따랐다. 오직 고대 총장만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다 총장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정권마다 총리직 제안이 있었지만 번번이 거절했다. 장준하와 함께 광복군을 이끌었던 그는 김준엽 총장이었다. 그 여파가 남아 있던 1990년대, 고연전이 끝나면 본관 앞 잔디밭에서 퍽퍽 소리가 났다. 만취한 학생이 김성수 동상에 술병을 던지는 소리였다. 치기를 섞어 동상에 올라 볼일을 보는 이도 있었는데, 동상 주변의 깨진 술병 조각에 손을 다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시절의 고대를 일컬어 머리 나쁘고 가난한 시골 학생만 입학하는 친일 대학이라고 욕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가진 집 자식들의 질펀한 잔치가 돼버린 고연전을 보고, 어떤 이는 축제를 빌려 데모했던 20년 전이 그리울 것이다. 그런 학생들이야말로 고대 정체성의 정수라고 아껴주던 총장도 그리울 것이다. 과거가 아닌 오늘에서, 힘있는 자가 아닌 소외된 자의 편에서, 집단 정체성을 새롭게 가꾸지 못하는 대학을 졸업한 탓에, 나는 내 정체성이 많이 부끄럽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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