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 가까이 떨어진 1월 어느날. 길가에는 얼마 전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바람까지 몰아쳐 체감온도는 훨씬 더 떨어졌다. 아침 7시50분, 서울 도봉구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영준(17·가명)군은 집을 나서다 망설였다. 교복만 입고 가기엔 너무 추웠다. 그는 검정색 패딩 점퍼를 걸쳐입고 학교로 향했다.
패딩 입은 생활지도부장 교사가 단속
‘교문 통과’는 매일 겪는 공포다. 학생들이 교문에 들어가기 전 명찰을 다는 등 복장 점검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늘 그렇듯 걷고 버스를 타고 다시 내려 걷기를 20여 분간 하니 학교 교문이 보였다. 겨울방학에도 선택의 여지 없이 보충수업을 받아야 하는 고등학생들이 꾸역꾸역 교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교문 안에는 생활지도부장 선생님이 서 있었다. 이군도 서둘러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 너 이리 와봐!”
생활지도부장 선생님이 들고 있던 막대기 끝으로 이군을 가리켰다. 이군은 쭈뼛쭈뼛 선생님 앞으로 갔다. 선생님은 이군의 패딩 점퍼를 주시하고 있었다. “니가 뭔데 패딩을 입었어?” 무시하는 말투에 이군은 울컥했다. 당시 선생님 역시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다. 이군이 패딩 단속의 불합리함을 따지려 하자 폭언이 쏟아졌다. 이군은 결국 아무 말도 못한 채 패딩을 벗고 교실로 들어왔다.
이 학교는 매년 겨울이 오면 ‘패딩 금지’를 선포한다. ‘패딩 점퍼’는 솜, 오리털, 거위털 등을 넣어 누벼 만든 점퍼를 통칭한다. 보온성과 활동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도 이 학교 학생들은 겨울에 패딩 점퍼를 입을 수 없다. 관측 사상 최대 폭설과 한파가 몰아닥친 올겨울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이군의 경우 방학 중에 걸렸기에 ‘주의’ 수준으로 끝났지, 학기 중이었다면 패딩을 압수당하고 벌점 1점을 받았을 일이다.
패딩은 왜 안 될까? 학교 쪽은 “패딩은 브랜드 때문에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대신 추우면 교복 위에 모직 코드를 입으라고 안내한다. 하지만 교칙을 살펴보면 어디에도 패딩 점퍼와 관련된 규정이 없다.
이 학교의 교복 착용 관련 규정은 △남학생은 바지통을 줄이지 않고 바지가 끌리지 않아야 함 △여학생은 치마폭을 좁히면 안 되고 치마 밑단은 무릎선 아래로 내려와야 함 △동절기에는 외투를 착용할 수 있으나 교복 상의보다 길고, 검정색이나 회색 계통의 단색이어야 하며 실외에서만 착용함 등이다. 비교적 세세하게 복장을 규정한 교칙에서도 동절기에 입는 외투의 종류에 대해서는 색깔 외에 정하고 있지 않다.
이군은 “도대체 패딩이 어떤 경위로 금지된 건지 교사도 학생도 모른다”며 “학교 쪽은 패딩이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하는데, 사실 모직코트가 더 비싸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가 학교에 입고 간 검정색 패딩 점퍼는 5년 전에 9만8천원을 주고 구입한 옷인 데 비해, 교복용 모직 코트는 교복 가게에서 25만원에 팔고 있다. 이군은 비싼 모직 코트를 아직까지 장만하지 않았다.
규정에 대해 학교 쪽에 문의하자 교사마다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생활지도부장은 “패딩을 입지 못하게 해 학부모 항의도 있었지만 패딩을 허용하면 안에 뭘 입었는지 단속할 수 없어 안 된다”며 “패딩 대신 모직 코트를 입든지 안에 내의를 입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생활지도부의 다른 교사는 “패딩은 단정해 보이지 않아서 금지하고 있다”면서도 “내 경우 빨간색과 같이 튀는 색의 패딩일 때만 단속하고 검정색이면 허용한다”고 말했다. 이군은 “선생님마다 단속 기준이 다르다 보니 친구들이 패딩 점퍼를 쇼핑백에 싸갖고 와서 단속이 덜한 선생님 시간에는 꺼내 입고 생활지도부장 선생님 앞에서는 벗곤 한다”고 말했다.
위화감? 패딩보다 모직 코트가 더 비싸이군은 “학생들도 추위에 떨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말도 안 되는 규정 때문에 패딩을 입었다고 욕설까지 들어 치욕스럽다”고 말했다. 무겁고 활동성이 떨어지는데다 비싸기까지 한 모직 코트는 앞으로도 사지 않겠다는 이군은 결국 올겨울을 교복만으로 나야 한다. 오는 3월,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이군은 1년 뒤에야 비로소 자유롭게 패딩을 입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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