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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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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되는 손님만 앉으세요

공과금 납부·입출금 담당하는 은행의 ‘빠른 창구’,
고객 위한 의자 없어 노인들까지 불편 겪어
등록 2009-06-19 16:08 수정 2020-05-03 04:25

6월1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근처의 농협 애오개역 지점에 들렀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농협 통장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다며 비밀번호를 바꿔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마침 고향집 앞에 농협이 있어 농협 통장을 마련해드렸고, 그 통장으로 용돈을 조금 부쳐드렸다. 아버지는 들어온 돈을 통장에 놓아두다가 이번에 집안일로 그 돈을 찾아야 했던가 보다. 통장은 기자 이름으로 돼 있어 기자가 직접 창구에서 비밀번호를 바꿔야 했다.

서울 마포의 한 농협 지점에서 고객들이 선 채로 은행일을 보고 있다. 농협은 상담 창구에는 의자를 설치해놓고 있지만, 빠른 창구에는 의자를 갖춰놓지 않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서울 마포의 한 농협 지점에서 고객들이 선 채로 은행일을 보고 있다. 농협은 상담 창구에는 의자를 설치해놓고 있지만, 빠른 창구에는 의자를 갖춰놓지 않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통장정리를 할 때도 앉았는데…

월말이 아니어서인지 그렇게 붐비지 않았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자의 차례가 됐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자가 없었다. 은행 창구 앞에 의자가 없어 기자는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기자의 주거래 은행은 하나은행이다. 월급통장이 하나은행 계좌로 돼 있어서 그렇다. 회사 안에 있는 하나은행 지점에선 앉아서 일을 봤다. 예금을 찾을 때도 앉았다. 통장을 정리할 때도 앉았다. 카드를 분실했을 때도 앉아 있었다. 해외 출장을 위해 원화를 달러로 바꿀 때도 그냥 그렇게 앉았다. 조카들에게 세뱃돈을 주려고 헌 1만원짜리를 빳빳한 새 돈으로 바꿀 때도 하품을 하며 앉아 있었다.

그런데 농협에선 서 있어야 했다. 반면 농협 직원은 앉아 있었다. 농협 직원에게 “여긴 왜 고객용 의자가 없죠?”라고 물었다. 농협 직원은 “원래 그래요”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어서 서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객은 서서 업무를 보고 직원은 앉아서 일하는 모양새가 영 어색했다.

이 지점만 그런가 싶어 걸어서 10여 분 걸리는 공덕역 지점을 찾았다.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도 손님 3명이 창구 앞에 쭉 서 있었다. 3명 가운데 한 명은 할아버지였고, 다른 한 명은 지팡이를 든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다리가 아픈지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다시 창구 앞으로 오기를 반복했다.

농협의 한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그 지점장은 “문을 연 지 2년쯤 됐는데 개점 때부터 창구 앞에는 의자가 없었다. 빠른 창구에서는 빨리빨리 일을 처리해야 하기에 의자가 있으면 오히려 손님들이 불편해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신 상담 창구에는 창구마다 의자가 있다”고 덧붙였다. 농협 쪽은 “빠른 창구는 업무를 빨리빨리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의자를 설치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유독 농협만 그런 게 아니라 일부 은행들도 빠른 창구에는 의자를 설치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요즘 은행들은 창구를 두 개로 나눠놓는다. 한 창구는 ‘빠른 창구’로 불린다. 이 창구는 전기료 등 공과금을 내거나 돈을 입출금하는 곳이다. 또 다른 창구는 ‘상담 창구’로 불린다. 이 창구에선 펀드와 카드, 대출 업무를 주로 한다. 단순 입출금이나 공과금을 받는 것은 은행들에 돈이 되지 않는다. 은행이 돈을 벌려면 펀드와 카드를 많이 팔거나 대출을 많이 해야 한다.

대부분의 은행은 빠른 창구를 작게 만들고 상담 창구는 크게 만든다. 이 때문에 빠른 창구에는 고객이 가득 차 있다.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뽑는 번호표의 대기인 수도 더 많다. 10여 분을 기다리고도 만약 송금 계좌가 다른 은행이면 수수료까지 물어야 한다.

굳이 은행을 찾지 말길, 불편한 진실

은행이 빠른 창구에 의자를 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 안 되는 고객은 일어서서 좀 불편하게 업무를 보거나 굳이 은행을 찾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런 고객이 많이 오지 않을수록 은행들은 창구 직원의 인건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에게는 불편하지만, 이는 ‘불편한 진실’이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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