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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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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마을 대청소

등록 2010-05-04 18:05 수정 2020-05-03 04:26

1.
기억할까. 오래전 1970년대 일이다. 한 달에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새마을 대청소’(이 명칭도 깔끔한 기억은 아니다)라는 행사가 있었는데, 주로 동네 주민들이 나서서 인근 하천 둔치에 자란 잡초를 뽑는 것이었다. 일종의 무보수 노력 봉사였다. 당시엔 동네마다 통장·반장 아저씨가 있었다(지금도 있다고 하는데 그 존재감은 잘 모르겠다). 바로 앞집에 살던 통장 아저씨는 새마을 대청소가 있는 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이웃들을 깨우러 다녔다. 참석 여부를 체크했다. 그때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이던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이 너무나 싫었지만, 하늘 같은 아버지와 형이 삽자루를 들고 나서면 조그만 연장이라도 챙겨들고 따라나서야 했다. 통장 아저씨도 채근했다. 아침도 먹기 전에 하천 둔치, 당시 용어로는 고수부지에 나가 에 맞춰 몸을 푼 뒤, 못생긴 잡초를 열심히 뽑았다. 통장 아저씨는 부지런히 출석 체크를 했다. ‘일당’을 채우려 못생긴 풀을 마구잡이로 뽑노라면, 뽑지 않아야 할 착한 풀은 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다음날이면 고수부지는 깔끔해졌다. 내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는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다음날은 보기 좋은 동네가 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열심히 삽질을 해서 잡초를 뽑아도 개천 물은 썩어들어갔다. 여름이면 친구들과 고무신으로 송사리를 잡고 겨울이면 얼기설기 만든 썰매를 지치던 동네 개천이 어느 때부턴가 악취를 풍겼다. 이상하게 생긴 물풀이 잔뜩 생기고, 물빛은 탁해지고, 송사리는 없어졌다. 동네 형이 잡아다 구워주던 개구리도 사라졌다. 개천 물은 겨울에도 튼실하게 얼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각종 생활용수나 산업폐기물이 그리 흘러들었던 것 같다. 바야흐로, 산업화의 시대였다. 그리고 독재의 시대였다. 생각해보시라. 지금 당신에게 아침 출근 전에 일어나 근처 하천 둔치에 나가 ‘환경미화’ 작업을 하라고 한다면 어떨지. 그런 정책이 통하던 시절, 아무도 토를 달지 않던 시절, 1970년대였다.

2.
이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국가적 동원은 생각도 못한다. 일상도 바뀌었다. 관심사도 넓어졌다. 누구나 생태를 이야기한다. 작은 생명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이야기한다. 텔레비전에도 나온다. 조·중·동에도 나온다. 입시에도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새마을 대청소’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식전부터 대문을 두들기던 통장 아저씨도 필요 없다. 자동으로 빠져나가는 세금이면 된다. 그 돈으로 4대강을 대청소하고 있다. 뒤집어엎고 있다. 귀한 생명체들이 멸종당하고 있다. 조물주의 조화든 진화의 신비든 사람이 알 수 없는 힘으로 탄생한 생명체들을 죽이고 있다. 다수가 반대해도 소용없다. 를 틀면 모두가 정해진 체조 동작을 했던 그때처럼, 모두 숨죽이라고 한다. 후렴구처럼 따라 하라고 한다. 선관위가 나서고 경찰이 나선다. 아침 일찍 고수부지에 삽 들고 나가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그 고수부지에 서 있다. 철갑 같은 포클레인의 칼날으로 그곳에 서 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삽으로 떠서 던져버린 잡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금 미호종개·꾸구리·남생이·단양쑥부쟁이가 그런 처지다. 의 독재에 신음하던 1970년대에 인간의 마음은 몰라주고 저 혼자 생생하던 그 생명들이 이제 우리에게 아우성친다. 그때를 용서해달라고, 당장 죽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아니다, 미안하다.
시류는 우리 탓이요, 너희는 영원한 자연 아니더냐.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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