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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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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바게닝

등록 2009-01-15 11:24 수정 2020-05-03 04:25

“이런 말을 하시면 어떡해요. 이거 불리한 건데… 이건 제가 빼줄게요.”
검사가 경찰 조서의 일부분을 가리키며 말한다. 피의자는 어리둥절해한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무심결에 한 말인데, 그게 불리한 진술이었구나. ‘검사님’이 그런 것까지 신경 써주시니 감지덕지할밖에. 그러나 사실 그 부분은 법률적으로 별 의미가 없는, 있으나 마나 한 진술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이 애매해요. 좀 자세히 얘기해봐요.”
검사가 조서의 다른 부분을 지목하며 한 말. 이미 ‘내 편’임을 과시한 ‘검사님’에게 못할 말이 어디 있으랴. 피의자는 자신을 생각해서 물어보는 것으로 알고 성심성의껏 설명한다. 그 부분이야말로 해당 사건에서 법률적으로 핵심적인 대목이다. 그렇게 검찰 조서가 작성되고, 그것은 피의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증거능력 있는 진술서가 된다.
검사 출신 한 인사가 술자리에서 들려준 일화를 재구성해봤다. 오래전 일이라고는 하나, 법률 지식과 권력관계에서 하늘과 땅 차이인 검사와 피의자 사이에선 지금도 얼마든 가능한 상황일 것이다. 법률전문가인 변호사가 옆에서 도와준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으련만, 현실은 아직도 그렇지 않다. 2008년 이 선정한 올해의 판결에는 ‘조사 과정에서 검찰 수사관이 변호사에게 피의자와 떨어져 앉으라고 명령한 것은 부당하다’는 법원 결정이 선정됐다. 사건이 벌어진 건 2008년 6월이었다.
죄지은 이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건 동물 집단에도 통하는 보편율이다. 집단에 위해를 가한 개체는 여지없이 힘센 이빨이나 발톱의 응징을 받는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시민이 처벌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더 높은 차원의 원칙이 있다. 문명화한 사회일수록 그 원칙에 더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검찰이 올해 안에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피의자가 유죄를 인정하면 정식 재판 없이 협상으로 형량을 확정짓는 것)이라는 낯선 제도를 입법화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다. 그런데 그 의도가 정말 낯설다. 형사사법 절차의 변경 논의라면 의당 앞서 말한 원칙, 즉 피고인의 인권 보호가 출발점이 돼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들리는 말이라곤 ‘그동안 피의자 인권이 너무 신장돼 수사를 못해먹겠다’는 식이다. 그러니 검찰권을 한층 강화하는 쪽으로 이 제도를 도입하자는 얘기다.
미국은 유죄 사건의 90% 이상이 플리바게닝의 결과이고 플리바게닝을 3분의 1 줄일 경우 정식 재판 건수가 400%가량 증가할 것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올 만큼 플리바게닝이 보편화했다. 하지만 찬반론은 여전히 팽팽하다. ‘무고하지 않은’ 피고인 처지에서는 형량을 줄일 수도 있고 변호사 비용도 아끼고 사회적 비난도 최소화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게 찬성론의 요지다. 검찰이나 법원 쪽도 이런 사건을 쉽게 처리한 뒤 중요한 사건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다. 재판의 효율성이 가장 큰 근거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법원도 이 제도를 반대한다. 재판의 효율성이나 사법적 정의 구현보다는 검찰 수사의 편의성이 논쟁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반대론의 중심은 이 점에 쏠린다. ‘무고한지 아닌지 모르는’ 살인 피의자에게 검사는 “널 1급 살인죄로 기소할 수 있어. 유죄가 나면 넌 사형이야(미국은 선진국에서 거의 유일한 사형 집행국이다). 하지만 2급 살인죄로 낮춰줄게. 그러니 자백해”라고 회유 또는 협박을 할 수 있다. 재판이 완전무결한 건 아니므로, 무고한 피의자라도 어쩌다 1급 살인죄로 유죄선고를 받게 될지 모를 위험, 그러니까 형장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압박을 느낄 수 있다. 검찰은 법정에서 증거를 통해 유죄를 끌어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백을 받아낼 여지가 커지는 셈이다.
플리바게닝 제도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건 유익한 일이 될 수 있다. 이는 진보·보수를 떠나 찬반이 엇갈리는 흥미로운 쟁점이기도 하다. 다만 그 논쟁을 촉발하는 주체가 검찰이 되려면, 형사사법 절차에서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를 더 쌓아야 할 것이다. 지적장애인(2급)인 미성년 소녀를 상대로 영아 유기치사 혐의를 조사하면서 보호자도 없이 강압수사를 해 자백을 받아내는 게 대한민국 수사기관이다(1월5일 국가인권위원회 권고 참조). 플리바게닝의 대전제인 ‘조사 과정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게다가 검찰은 촛불시위, 미네르바, 야당 정치인, 시민단체 등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세로 ‘정치 검찰’ ‘권력의 시녀’라는 오래된 별명을 되찾으려 애쓰는 형국이다.
그러니 미국의 법학자 조지 피셔의 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에서 승리한 대다수의 제도와 마찬가지로 플리바게닝이 비판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것은 그것이 힘있는 이들의 이해에 복무했기 때문이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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