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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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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뿔 좀 내세요

등록 2008-02-29 00:00 수정 2020-05-03 04:25

▣ 백은하 〈매거진 t〉편집장

엄마와 떨어져 산 지, 아니 가족에서 떨어져 혼자 지낸 것이 벌써 햇수로 16년이다.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 맞이한 어쩔 수 없는 독립시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그렇다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 일도 없었으니까. 서울과 부산으로 나뉘어져, 잡지사와 약국에 매여, 나와 엄마는 1년에 두어 번쯤 만나는 게 고작이다. 자주 못 보다 보니 싸울 일도 없고, 싸울 일이 없으니 관계가 악화되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는다. 엄마와 나빴던 기억이 언제였지. 고등학교 때 아침에 안 깨워줬다고 제 혼자 짜증을 냈던 게 마지막이었나. 그러다 보니 나에게 엄마, 는 점점 지지고 볶는 현실 속의 존재라기보다는 조용히 엄마, 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가슴이 싸해지는 저 너머의 노스탤지어다. 아마 엄마에게 나는 그렇지 않겠지만.

한자나 은아 같았다면

지난 주말 를 보면서 문득 한자(김혜자)나 은아(장미희)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좀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고상한 매무새와 예의 바른 말투 속에 철저한 이기심을 보이는 은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대척점에 위치해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처럼 보이는 한자까지 그녀들은 모두 ‘뿔’을 낼 줄 아는 엄마들이다. 한자는 생각지도 않던 손자를 안겨주고 “엄마가 키워줄 거지?”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아들 내외에게 절대로 그럴 생각 없다고 단언하고 시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요즘은 부모도 변했어요”라고 말한다. 의 첫째 며느리, 김혜자라는 배우의 몸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녀들은 전혀 다른 엄마다. 물론 어느 CF에서처럼 “테레비 옆집 가서 본다”고 아들에게 전자제품 사내라고 칭얼대는 시골 부모까지는 아니라도 자신이 싫은 것, 해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왜 뿔이 나고 왜 섭섭한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화를 내’지 않고 ‘뿔을 낸’다.

그런 한자에 비하면 내 엄마는 의 영자(고두심)에 가깝다. 월북한 외할아버지 때문에 일찍 홀로 사는 법을 터득하고, 저 홀로 조숙해버린 나의 엄마는 ‘뿔’이란 걸 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바람 잘 날 없는 삼남매를 키우면서, 괄괄한 아버지의 성격에 맞춰가면서 그녀에게도 뿔날 일이 왜 없었겠냐마는 그동안 살아온 당신만의 방법대로 그 모든 스트레스를 풀어내셨다. 어쩌면 계속 쌓아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엄마가 존경스러운 한편 좀 징글징글하기도 했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단언하거나 다짐한 적은 없지만 그녀 때문에 나는 좀더 내 감정을 잘 드러내고, 조금 더 이기적으로 내 것을 잘 챙기는 사람으로 자라난 것 같다. 아마 의 은아 같은 이기적인 엄마 밑에서 자랐다면 반대로 좀더 참고 좀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아니라 한 여자로 보인다

나이를 한살 두살 더 먹어가서인지,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서인지 이제 엄마가 엄마가 아니라 한 여자로 보인다. 그녀가 견뎌낸 시간들이 안타깝고, 그녀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조금 더 이기적인 내가 챙겨주고 싶다. 그래, 이제 나도 뿔 좀 내는 엄마를 보고 싶다. 지금까지는 못 그랬어도 남은 생애는 마음껏 투정하고 사셨으면 좋겠다. 갑자기 전화해서 “난 아무것도 필요 없다”며 새 냉장고를 사달라고 졸라도 귀여울 거다. 물론 의 엄마처럼 너무 사악하게 진화하신다면 좀 곤란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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