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나라의 흥망에는 산간의 나무꾼도 책임이 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옛 어른들의 말씀입니다. 명말·청초의 사상가인 고염무가 에서 한 ‘天下興亡 匹夫有責’(천하흥망 필부유책)과 비슷한 뜻일 텐데, 한 국가의 흥망성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17세기 왕권사회에서도 국가 구성원 개개인의 책임의식이 이처럼 강조되고 있다니 자못 놀랍습니다. 하물며 국민 모두의 동일한 1표가 모여 지도자를 뽑는 현대 시민사회에서 구성원 각자의 책임의식이야 아무리 강조돼도 지나치지 않을 테지요.
그러나 고염무의 경구는 이렇게 받아들여야 제 뜻이 온전히 살아날 듯합니다. 누구든 나라의 흥망에 책임이 있으되 그렇다고 책임의 경중(輕重)이 모두에게 같은 것은 아니라고.
고염무의 가르침을 떠올린 것은 최근 시청한 한 공중파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 때문이었습니다. 이명박 새 정부의 역점 추진사업인 경부운하의 경제성과 환경 파괴 여부 등을 놓고 교수들이 찬반으로 나뉘어 치열한 토론을 벌인 자리였는데, 운하 건설을 찬성하는 두 학자의 말이 계기가 됐습니다.
학자 A씨. “(이명박 당선자는) 선진국을 우리보다 몇 배나 왕래해 앞으로의 방향을 잡고 있는 분이다. 그 많은 흑색선전 속에서 운하 추진을 약속했고, 소신이다. 그분은 감을 가진 분이다. 조용히 지켜보고 의견을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자 B씨. “이명박은 다르다. 청계천을 만들 때 많은 사람들이 20년 걸려도 안 된다고 했는데 2년 만에 했다. 운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명박이 하기 때문에 반대한다. 정치적인 반대다.”
평행선을 달리긴 했어도 구체적인 수치와 나름의 근거가 오가는 흥미진진한 토론회였는데, 이상하게도 운하 추진론자들의 근거가 ‘이명박’으로 흘렀습니다. 합리성과 과학성으로 설득력을 얻어야 할 학자들이 쉽게 새 대통령에 기대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토론을 통한 접점찾기는 불가능하고 정치논리만 횡행하게 됩니다. 이명박이 싫어서 반대한다니, 정동영이나 문국현, 혹은 권영길이 운하를 추진했다면 181개나 되는 시민·사회단체(경부운하 저지 국민행동)가 찬성하고 나섰을까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많은 학자들이 권력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의 제1 책무는 정책을 꼼꼼히 따지고 ‘싫은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지식인의 소임인 내부 견제장치 역할입니다. 이 견제장치가 제대로 작동해야 권력은 정상 궤도를 이탈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스스로 ‘백년대계’라 부르는 경부운하를 이명박 당선자의 ‘감’이나 ‘소신’으로 설득해내려 한다면, 그 견제장치는 이미 경고등이 켜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명박 당선자는 ‘메시아’가 아니며, 흥망에 대한 책임의 경중은 결코 모두가 같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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