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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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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 이상락

등록 2007-08-24 00:00 수정 2020-05-03 04:25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신정아, 이지영, 이현세, 심형래, 이창하, 김옥랑, 윤석화, 장미희….
지난 7월 초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를 시작으로 불과 한 달여 만에 학력을 속여온 사실이 드러났거나 의혹을 산 ‘유명 인사’들입니다. 어떤 이는 언론이나 네티즌의 집요한 추적으로 허위 학력이 폭로됐고, 어떤 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가짜 학력을 고백했습니다. 어쨌거나 한국 사회엔 지금 유례없는 ‘학력 검증’의 바람이 불고 있고, 누가 제2·제3의 신정아로 발가벗겨질지를 향한 야릇한 호기심마저 감돕니다.
검찰이 전국 13개 지방검찰청에 ‘신뢰 인프라 교란사범 단속 전담반’을 편성해 올 연말까지 학위·자격증·국내외 인증 등 3개 분야를 집중 단속할 예정이어서 한동안 검증 바람은 이어지겠지요. 서울시교육청도 4만여 명에 이르는 서울 시내 학원 강사의 학력 위·변조 조사에 팔을 걷어붙였답니다.
21세기에 ‘신뢰 인프라’(참 독특한 조어입니다) 교란사범 단속이라니, 우리 사회의 미성숙과 낮은 도덕 수준에 낯이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강고한 ‘학벌’의 힘을 새삼 확인하는 일이어서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합당한 노력이나 대가를 치르지 않고 위조 학력에 편승해 사회적 입지를 구축하려는 행위는 분명한 반칙이자 부도덕한 무임승차입니다. 실력을 갖추기 위해 묵묵히 애쓰는 많은 보통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기도 합니다. 반칙 행위의 책임을 당연히 져야 할 테지요.
그럼에도 거센 허위 학력 적발 캠페인은 또 다른 위험성을 낳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겨줍니다. 간판을 권하는 ‘학벌사회’의 병폐를 해소하지 못한 채 검증만 강화하는 것은 학벌의 철옹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검증의 문을 통과하는 것만으로 능력이 인정되고, 학벌이 없거나 낮은 사람들과의 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풍조가 조성될 수 있습니다. 도리어 ‘그들만의 리그’를 강화해주는 꼴이지요.
‘스스로 능력을 갖추면 되지 웬 학벌 핑계냐’는 반론도 가능할 겝니다. 올 상반기 고은 시인은 서울대에서 ‘우리들의 안과 밖’을 주제로 정식 강좌를 맡았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군산중학교를 중퇴한 것이 최종 학력입니다. ‘실력사회’의 훌륭한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제2의 고은’보다는 ‘제2의 이상락’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정확할 듯싶습니다. 빈민운동가 출신인 이상락씨는 17대 총선에서 당선됐으나, 초등학교 학력을 고졸로 속인 사실이 드러나 의원직에서 쫓겨났습니다. 가난 탓이었지만, 부족한 학력은 도덕성과 신념을 먹고사는 운동가조차도 이겨내지 못하게 만든 겁니다.
학벌 철폐를 목표로 하는 시민단체인 ‘학벌없는사회’(antihakbul.org)의 홈페이지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학벌에 따라 사람을 나누고 절망과 차별을 되물림하는 학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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