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지난 7월26일,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갓 개봉한 가 궁금해서입니다. 예상대로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긴장과 감동, 웃음과 눈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2시간의 상영 동안 화면에만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곳곳에서 들리는 낮은 울음과 훌쩍거림을 좇기 바빴고, 10~20대 젊은이들이 얼마나 자리를 메웠는지 확인하느라 연방 주위를 힐끔거렸습니다.
영화 제작자나 출연 배우도 아닌데 분위기 살피기에 바빴던 것은 한편으론 직업 본능일 테고, 다른 한편으론 그만큼 기다림이 컸던 탓일 겁니다. 참 오랜 길을 걷고 나서야 여기에 다다랐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의 일주일여를 온전히 복원하는 데 27년의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하긴 영화 마지막에서 계엄군의 총탄 세례를 받기 전 주인공이 외친 “우린 폭도가 아니야”라는 절규를 공인받는 데만도 20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광주사태’로 표현됐던 5·18은 1995년 특별법을 통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됐고, 1997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큽니다. 당시 어떤 고통과 상처가 있었고, 왜 그들은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지가 리얼하게 전해졌지만, 아직도 가해자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7월24일 발표한 광주민주화운동 진상 조사 결과에서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남도청 앞 발포를 명령한 문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발포 명령계통을 정확하게 설명해줄 진술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등 당시 군 지휘계통의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살아 있으나, 그들은 ‘침묵의 카르텔’로 강고하게 진실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주의 5월은 여전히 ‘반쪽짜리’이고, 온전한 진실을 향한 쉼없는 노력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력 대선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최근 5·16을 “구국의 혁명”이라 표현했습니다. 아버지 박정희와 연관된 일이라 냉정한 평가가 부담스러웠다손 쳐도 대한민국의 역사 시계를 2007년에서 한순간에 수십 년 전으로 되돌린 느낌입니다. 5·16은 1980년대까지 ‘군사혁명’ 혹은 ‘혁명’으로 미화됐으나, 1992년부터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서 ‘군사정변’으로 규정됐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숱한 질곡을 낳았던 5·16이 30여 년 만에 ‘쿠데타’로 자리매김된 겁니다. 이는 오랜 역사 평가 작업의 결과이자 사회적 합의입니다. 이를 쉽게 ‘혁명’으로 되돌리려는 것은 역사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며 사회적 합의의 파괴 행위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내부에는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를 보는 동안 머릿속에서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는 말이 맴돌았습니다. 박 전 대표가 이 영화를 관람하며 역사와 대화해보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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