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노무현 대통령이 결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거법 위반 결정을 받았습니다. 지난 6월2일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한 강연이 공무원으로서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결론난 것입니다. 자연스레 2004년 3월 ‘탄핵의 추억’ 시절이 떠올려집니다.
최고 관심사야 한나라당이 탄핵 카드를 다시 꺼내드느냐일 텐데, 그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습니다. 한나라당이 ‘탄핵’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4년과는 다른 이런 상황 전개는 노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공방이 ‘노무현 대 이명박·박근혜(한나라당)’의 ‘대결’적 측면과 동시에 ‘공존’적 측면을 띠고 있는 데 기인합니다. 이 ‘대결적 공존’이야말로 대선을 6개월가량 앞둔 지금의 정치 지형을 읽어내는 한 키워드가 아닐까 합니다.
노 대통령은 반박할지 모르지만, 그는 한나라당과의 공방을 통해 존재감을 높이고 정치적 이익도 얻는 것으로 보입니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집권이 끔찍하다”는 말과 이명박·박근혜에 대한 비난으로 단박에 정치 중심에 섰습니다. ‘참여정부의 실패론’을 공박하며 자신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동시에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둡니다. 선관위 결정이 나온 뒤 청와대가 법적 대응 방침을 분명히 한 것도 이런 정치적 주도권을 유지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반영입니다.
한나라당도 손해볼 게 없는 분위기입니다. 노 대통령의 발언에 발끈해 선관위에 고발했지만, 탄핵 제기와 같은 ‘레드 라인’만 넘지 않으면 상황을 관리하며 즐길 수 있습니다. 우선 이명박·박근혜 두 진영 사이의 사활을 건 검증 싸움이 무뎌집니다. 집안 다툼의 물꼬를 외부로 돌려 숨통을 틉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2월 대선의 경쟁자들을 국민의 관심에서 지우는, 범여권 후보(또는 반한나라당 후보)의 ‘실종’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노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대결이 부각되는 한 손학규·정동영·김근태·이해찬·권영길·노회찬·심상정 등 누구도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소통합이나 대통합 등 여권의 움직임도 주목받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선은 흔히 ‘미래를 다투는 게임’이라고 말해집니다. 후보자의 국가 경영 전략과 비전, 그가 이끌어갈 사회의 모습을 놓고 벌이는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탓에 이 게임에서 현직 대통령은 ‘죽은 권력’의 처지가 숙명입니다. 그런데도 ‘죽은 권력’이 전면에 나서면 미래 권력을 다투는 세력은 설 자리가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국민의 선택권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국민의 눈앞에서 미래 권력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의 치열한 승부가 충분하고 다채롭게 펼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냈다’는 말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삼국지 얘기일 뿐입니다. 혹 노 대통령이 ‘죽은 공명’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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