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씁쓸합니다. 당혹스럽고 황당하기도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둘째아들 홍업씨가 4·25 재·보궐 선거의 전남 무안·신안 지역 민주당 후보가 됐습니다.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자, 민주당이 부랴부랴 전략공천을 결정했습니다. 현직 대통령 아버지의 후광에 기대 기업체 등으로부터 수십억원을 받아 구속됐던 그가, 이번엔 전직 대통령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유력한 국회의원 후보가 된 것입니다. 신안은 김 전 대통령의 고향입니다.
무소속이 하루아침에 당 후보로 탈바꿈하는 정당 구조의 취약성, ‘누구의 아들’이면 ‘묻지마 당선’이 가능하다고 믿는 맹목적 지역주의, 범죄행위에 대한 너무 쉬운 면죄부 부여까지 한마디로 요지경 시리즈입니다. 한국 정치의 후진성의 비빔밥이랄까요. 이런 ‘코미디보다 더 코미디 같은’ 상황은 유권자들이 그를 여의도로 보내줄 경우 클라이맥스로 치닫겠지요.
김홍업씨의 출마 과정은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경계했던 ‘값싼 은혜’(cheap grace)의 교훈을 떠올리게 합니다. 본회퍼는 1930년대부터 나치에 저항하다 1945년 교수형을 당했는데, 당시 독일 교회가 나치 정권의 폭압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것을 두고 값싼 은혜에 빠져 있다고 통박했습니다. 값싼 은혜란 회개 없는 용서의 설교, 참회가 없는 사죄 등을 뜻합니다. 달리 보면 ‘쉬운 용서’가 불러올 비극에 대한 경고인 셈입니다. 신은희 국제평화대학원대 교수는 최근 한 글에서 “한국 정치에 ‘값싼 은혜’의 풍토가 만연해 있다”는 취지의 비판을 했는데, 퍽 공감이 가는 지적입니다.
정도는 달라도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지사에게서도 값싼 은혜의 위험성이 느껴집니다. 손 전 지사는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 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탈당 이유를 댔습니다. 일리 있는 대목이지만, 그렇다고 탈당의 모든 것이 설명되진 않습니다. 그는 한나라당에 속해 있던 14년 동안 ‘비주류’로 불리긴 했어도 사립학교법이나 대북정책 등을 놓고 당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탓인지 한나라당에 ‘남아 있는 자’에 대한 비판보다는 ‘떠난 자’로서의 반성과 설명이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당내 경선의 불리함 때문에 당을 뛰쳐나왔다는 부정적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그의 현실입니다. 손 전 지사가 값싼 은혜에 기대려 한다면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겁니다.
참, 강준만 교수가 맞춤하게도 도전적이고 도발적인, 하지만 유쾌한 ‘손학규론’을 보내왔습니다. 장안에 회자될 게 분명한 이런 칼럼을 소개하는 것은 잡지를 만드는 처지에선 무척이나 즐거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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