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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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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플레이

등록 2006-10-14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편집장 k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비극입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포클레인 중장비로 막다니요.
그들의 무기가 침묵뿐이었다면, 분노했을지언정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무모한 공세를 펴지 않았더라면, 계획에도 없던 ‘국세청 표지’를 꾸미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이번호 표지는 ‘불행한 언론플레이’의 산물입니다.
은 3주 전 628호에서 “국세청, 국회에 ‘검은돈’ 뿌렸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전군표 청장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국세청 직원들이 여당 의원 보좌진들에게 최소 두 차례 50만원씩을 건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뒤 저와 담당기자를 상대로 어떤 로비전이 있었는지는 본문 표지이야기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오버에 오버를 거듭했습니다.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민한 스프링을 잘못 누른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를수록 솟아오르는 스프링 말입니다.

물론 로비가 조직적이고 집요했다는 사실만으로 기사를 마구 키울 순 없습니다. 회사 내 일부에선 “감성적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국세청의 구조적인 비리나 경천동지할 부패 스캔들을 폭로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는 거였습니다. 일견 사소해 보이는 문제로 꼭 ‘정면충돌’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겁니다. 이런 기사 안 쓴다고 누가 뭐라 하지는 않습니다. 슬쩍 넘어가도 됩니다. 그럼에도 은 이번 사안을 크게 드러내 낱낱이 밝힙니다. 이 아니라면 국세청의 치부가 영원히 성역으로 남으리라는 오만한 노파심도 한몫을 했습니다.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잡지를 만들면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건 처음입니다. 이번호 표지로 인해 혹여 한겨레신문사 경영진이 세무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세무기관은 경영을 하는 이들에게 두려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이용해먹는 국세청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국세청 홍보담당관은 왜 을 방문할 때마다 마포세무서장을 대동했을까요. “너희 회사 약점을 다 알고 있다”는 뜻일까요.

몇 개월 전에도 한 대기업의 로비전에 포위된 적이 있습니다. 비판적인 기사가 나가는 걸 미리 알게 된 그 기업의 홍보 담당자는 한겨레신문사의 여러 요로를 통해 줄기차게 선을 댔습니다. 저에게도 질리도록 전화를 했습니다. 로비를 해도 해도 안 통하자 이렇게 나오더군요. “그 기사 다 맞다. 그래도 딱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겠나.” 그러면 기사를 실으면서도 인간적으론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진실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국세청이 또다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합니다. 또 저에게, 담당기자에게 전화 공세를 펼까요. 혈연·지연·학연을 총동원해 한겨레신문사 직원들을 괴롭힐까요? 역설적으로 보자면, 국세청은 이번 기회를 통해 ‘구악’의 허물을 벗을 찬스를 잡았습니다. 방법은 하나!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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