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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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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하게 노는 이야기

등록 2006-09-28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편집장 k21@hani.co.kr

놀기 위해 일합니다.
일이 힘들어도 놀 생각을 하면 즐겁습니다. 그래서 견딥니다. 한국방송 개그 프로그램 에서도 ‘몸빼아줌마’ 안일권의 대사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생 뭐 있어? 노는 거야~.” 쉽지는 않습니다. 즐겁게 잘 놀려면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니까요. 막상 놀려다가도 귀찮아서 포기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후배 중 한 명은 명절 연휴 때마다 한국을 떠납니다. 반드시 찾아가는 아시아의 특정 국가가 있습니다. 그곳엔 친구들이 우글거린다고 합니다. 후배는 그 낙으로 1년을 버티는 것 같습니다.
<to do before i die>(한겨레출판)라는 책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100가지를 현실로 옮기자는 내용인데, 저자의 서문에 깊은 공감이 갔습니다. 91살이라는 저자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생의 하이라이트를 두 시간 동안 들려주셨다. 놀랍게도 자칭 일 중독자였던 할아버지가 자기 직업과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할애한 시간은 고작 2분에 불과했다.


그날 오후 할아버지의 화제는 대부분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과 할아버지에게 평화, 웃음, 깨달음을 안겨준 순간들이었다. …여자 쪽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힌 첫사랑, 20대에 쓴 희곡으로 받은 상과 재주 많은 이들을 보며 느낀 자부심, 70대에 떠난 중국 여행, 50년 전의 어느 날 오후에 벌어졌음직한 사소한 사건들이 말년에 이르자 머릿속 수면 위에 떠오른 모양이었다.”
개인적으로 최근 15년을 돌이켜보면 지독하게 밤일(!)을 해야 했던 마감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아닙니다. 빛나던 순간들은 따로 있습니다.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놀던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이 오히려 비중 있게 기억을 채우기도 합니다. 논다는 것은 향락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조직의 톱니바퀴가 아닌 자유인의 자격으로 평화를 얻는 것 자체가 노는 기쁨을 선사합니다.
얼마 전 12년 만에 옛 선배를 만났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다가 투옥과 해고를 겪었던 이였습니다. 현재는 예전에 위장 취업했던 회사에 다시 들어가 평범하게 생활한다고 했습니다. 한데 자꾸만 주변에서 노조 핵심간부를 맡으라는 제의가 온다고 합니다. 계속 거절을 하는데, 그 이유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강금실 변호사가 서울시장에 출마하며 가장 곤혹스러웠던 이유와 같습니다. 책임감 때문에 시도때도 없이 ‘마음에 없는 말’을 늘어놓아야 하는 건 고도의 감정노동으로 나중에 병을 부릅니다. 아무리 시대적으로 옳고 필요한 말이라도 그렇습니다. 놀려면 그런 말로부터 해방돼야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은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쉼표를 찍습니다. 한가위와 설 연휴에 한 번씩 책을 쉬므로, 강력한 쉼표입니다. 한 주 잡지 제작에서 놓여난다는 설렘 때문인지, 한가하기 짝이 없는 소리만 했습니다. 연휴 때 일하시는 분 빼고, 다들 놀 계획을 멋지게 꾸미시기 바랍니다. 말로는 이렇게 떠들면서 실제론 잘 놀지 못하는 제가 가증스럽지만 말입니다.</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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